통일컬럼 및 논단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

박상봉 박사 2006. 1. 14. 10:10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 


전후 서독의 대동독 정책은 할슈타인 독트린으로 대변된다. 서독정부 만이 대외적으로 유일한 대표성을 지니며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강력한 정책이었다. 이와 같은 대동독 정책이 큰 전환점을 맞게된 것은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신동방정책을 기치로 나치에 희생된 폴란드 영령에 무릎을 꿇어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하는 한편, 동독과는 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양독 간의 대화채널을 만들었다.

브란트 이후 서독 정부의 대동독 정책의 기조는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즉, 동서독 간 교류협력을 확대하여 동독사회를 개혁과 개방으로 이끌며 통일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고 실제로 양독은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영원히 평화공존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모습 뒤에는 수많은 눈물과 고통이 감추어져 있었다. 동독인의 서독 탈출이 끊이지 않았고 반민주적 일당독재체제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해마다 평균 20만명에 달하는 동독인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서독에 귀순하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한달 만에 세우는 이벤트도 연출하였다. 서방세계의 경화가 필요한 동독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서독의 마르크화를 챙겼고 서독은 동독인의 생명을 지키고 행복을 약속하는 일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였다. 동독 정부가 귀챦다고 서독으로 보내는 노인네와 병약자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였고 정치범들을 1인당 1만여 마르크씩 지불하고 석방시켜 서방으로 이주시켰다.


이렇듯 동서독 간 평화공존의 겉모습 뒤에는 분단으로 얼룩진 고통과 대립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고통과 대립이 전면으로 등장해 분단의 역사를 마감하는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1989년 가을의 일이다.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추진하였고 서방세계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운 삶에 많은 동독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동독인의 엑소더스가 시작되었고 양독 간 통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8월 8일 최초로 131명의 동독주민이 동베를린 소재 서독 대표부에 진입을 시작으로 동유럽 내 서독대사관에는 연일 몰려드는 동독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대사관의 뜰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텐트로 꽉 차 있었고 점점 증가하는 이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대사관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동독 탈출의 절정은 8월 19일 헝가리 민주단체와 범유럽 유니온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개최했던 한 행사장에서 벌어졌다. 이 행사를 위해 헝가리 정부가 국경을 서너 시간 개방하게 되었고 이를 틈타 900여명의 동독 청년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였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이후 가장 대규모의 탈출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독과 서독정부는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 이라고 불리는 한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 없는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대상은 헝가리 정부였고 목표는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의 개폐 여부였다. 동독은 헝가리 정부에게 사회주의 동맹국임을 강조하고 만약에 지속적으로 국경을 개방한다면 외교단절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동맹관계가 유지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이와 더불어 동독정부는 폴란드, 체코의 국경을 통제하였다.


이에 반해 서독정부는 자유를 찾아 고향도 등지고 탈출하고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은 같은 민족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을 설득하였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대오스트리아 국경을 지속적으로 개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외교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역사적이었는가는 당시 헝가리 총리와 외무상을 지냈던 네메츠 총리와 호른 외무상의 고백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고백은 당시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데어슈피겔 지에 게재되었고 호른 외무상은 무려 7, 8페이지에 달하는 당시의 역경의 순간들을 피력하였다.

결국 20세기 외교전은 인간에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월등한 서독의 승리로 끝났고 헝가리가 국경개방을 결정한 순간부터 2달간 무려 2만여명의 동독인들이 자유세계의 품에 안겼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베를린 장벽은 철거되었고 통일이 길이 활짝 열렸다. 1989년 11월 9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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