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통일독일과 중립화

박상봉 박사 2005. 11. 14. 08:29
 

통일독일과 중립화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이 붕괴되고 소련 및 서방 연합국 사이에 독일의 통일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자 통일된 독일의 군사적 지위에 대한 논의가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방 연합국들은 독일은 통일 후에도 나토(NATO) 회원국으로 잔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영국의 대처총리는 독일의 나토 잔류가 전제되지 않는 통일 논의는 거론조차 필요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서방연합, 나토잔류 전제 독일통일 양해


이에 반해 소련은 동독의 모드로브(Modrow) 총리와 독일의 군사적 위상에 대한 협의를 갖고 통일 후 독일은 무장을 해제하고 중립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방 3개국과 서독, 그리고 소련과 동독 간의 이 갈등은 군사적 차원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통일을 가늠할 핵심 사안이었다.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은 90년 1월 31일 투칭(Tutzing)의 기독교 아카데미에서의 연설을 통해 “통일 후 독일은 나토에 잔류하나 동독지역에는 나토군이 주둔할 수 없도록 하자”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독일의 중립화 주장과 관련해서는 서독과 서방 연합국은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고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도 이런 서방측 주장에 동참했다. 


체코의 국민 지도자 하벨(Havel) 대통령은 겐셔의 제안 후 일주일이 채 안된 2월 6일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독일의 중립화를 반대하고 이 사실을 고르바초프에게도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날인 2월 7일 폴란드 외무장관도 콜 총리에게 “독일이 중립화된다고 해서 자국에 이익될 것이 없다”고 전하고 겐셔의 제안에 동의해 주었다.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이탈리아 외무장관의 동의를 얻어 이 사안을 CSCE(유럽안보협력기구)에서 논의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당시 CSCE는 냉전이 해체되어 기존의 군사동맹관계를 대체할 범유럽기구를 구상중에 있었다.

국제정세가 반소 분위기로 전환되어가자 소련 당국자 사이에도 비공식적으로 독일의 탈군사적 중립화 요구는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판단 이 주장을 재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소련 공산당의 한 고위간부는 “우리에게 독일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능력이 사라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소련의 국내외 정세도 독일의 나토 회원국 잔류를 저지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지배권을 거부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에 소속된 나라들의 독립 움직임도 거세지고 있었다.


소련 국내사정으로 독 중립화 주장 철회


무엇보다도 90년 2월 7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헌법 6조의 개정을 통해 당의 독점적 지위권을 폐지하게 되자 국내정세는 급격히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연일 대규모 시위가 일었고 아제르바이잔,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에서는 민족주의가 살아나 소련군과의 유혈사태가 발생키도 했다. 결국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동독의 모드로브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은 이제 독일의 중립화를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말았다.

IUED

 

      

 

◇1990년 11월 19일 파리에서 열린 CSCE(유럽안보협력회의) 참가국 대표. CSCE의 유럽공동안보망 구상으로 통일독일은 NATO 잔류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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