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

박상봉 박사 2005. 10. 20. 10:03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 동독 정권에 공포

- 30년간 4만 2천건 수집 -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고 동독 국경수비대의 발포로 최초 희생자가 발생한 직후인 1961년 가을 니이더작센 州 국경도시 잘츠기터(Salzgitter)에는 특별한 사법기구가 탄생했다. 이 기구는 중앙범죄기록소(Zentrale Erfassungsstelle)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제거되기 까지 만 28년 동안 중단없이 운영되었다. 임무는 동독 공산단 사통당(SED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의 범죄행위를 기록하고 그 증거자료들을 보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도 중앙범죄기록소의 설치를 환영했고 기존의 나치 전범기록소와의 긴밀한 협조를 주문하기도 했다. 나치의 범죄적 수단들이 동독 공산정권과 유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기록소의 증거자료 보전업무는 통일 이후에나 가능한 동독 공산정권의 범죄행위에 대한 추적을 가능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잠재적 범죄행위자들 경고하고 행위의 불법성을 환기시키는 기능도 하고 있었다.


중앙범죄기록소는 동독공산당 지도부와 관영언론들에게는 냉전의 산물로 가장 불편한 존재 중 하나였다. 이들은 기록소를 서독 스파이센터, 보복주의의 산실이자 동독 내정간섭 기구로 몰아붙였다. 호네커는 동서독 관계가 거론될 때마다 중앙범죄기록소에 대해 항의했고 이 기관의 종사자들에게는 형사적 책임을 물어 10년 징역형에 처한다는 법규를 제정 공포하는 등 강경대응을 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게라(Gera) 요구라고 하는 대서독 관계개선을 위한 조건을 내걸었고 그 중에는 이 중앙범죄기록소의 해체가 들어 있었다. 동독의 이런 과민한 반응 속에서 사민당(SPD)은 1984년 중앙범죄기록소의 해체를 요구하는 안건을 의회에 제출했고 연방정부와 기민련(CDU)은 이를 부결시켰다. 1988년부터는 사민당이 이끌던 브레멘, 자아란드, 함부르크와 노드라인 베스트팔렌 주들이 일방적으로 중앙범죄기록소 운영을 위한 분담금을 납부를 중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후에 콜 통일독일 총리는 이런 사민당의 행동에 대해 주 정부예산 절감이 아니라 호네커와 공산정권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분석했다. 왜냐하면 당시 주별 운영분담금 규모는 자아란드가 년 3,506 DM, 함부르크가 6,000 DM에 불과했으며 주 정부의 총 분담금이 25만 DM(약 1억3,000만원)에 불과했었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통일독일 10주년을 맞이해 개최된 ‘유럽과 독일통일’이라는 회의에서 콜 통일총리는 “잘츠기터 소재 중앙범죄기록소는 통일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11개 모든 州가 동의해 세웠다.

그동안 이 곳에는 동독 사통당의 불법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범죄행위와 인권침해에 관한 증거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잘츠기터 기록소의 존재만으로도 동독 지도부에 공포심을 유발시켰고 정의를 추구하는 모든 독일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음을 상기시켰다.

이것이 사실이었음은 당시 동독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들의 증언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증언에 따르면 간수들은 잘츠기터의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매우 긴장하고 있었으며 호네커 자신도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독이 몰락할 때까지 중앙범죄기록소가 수집하고 있던 범죄자료는 4만 2천건에 달했으며 1991년에는 지난 28년 간의 활동을 하나의 보고서로 묶어 발간했다. 이 자료는 통일 후 구동독 청산 절차 속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범죄자료는 베를린 장벽에서의 희생자는 물론이고 불법구금, 살인, 주민탄압 등 가능한 한 모든 범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희생자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령 제101호


동독에 의해서 자행된 범법행위 중 동서 국경에서 있었던 탈출자에 대한 사살은 분단의 비극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동독국경수비대에게 하달된 사살명령(명령 제101호)는 다음과 같다.

“월경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막아낸다. 무단 월경자는 말살시켜야 한다. 공격 개신 전에는 1차로 ‘정지, 움직이면 쏜다’라는 구두경고를 실시한다. 구두경고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경우 조준사격을 행한다. 단 사격 방향이 서독이나 서베를린일 경우는 사격을 금한다. 여성과 어린이는 사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공식문서는 대외선전용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어린이, 여성은 물론이고 이미 국경을 넘어 서독에 도착한 탈출자에게도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1966년 3월 14일 베를린 노이쾰른 동독 구역에서는 10살과 13살 난 어린아이가 기관단총에 난사를 당해 즉사하는 등 어린이 40명 여성도 3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탈출자 Peter Fechter 사살사건은 당시 세계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Fechter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1시간 동안 방치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베를린의 한 주민이 약통을 벽을 넘어 던져주었으나 Fechter는 이를 잡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1시간 후 동독국경수비대는 Fechter의 시신을 어디론가 운반했다.



범행조사사례


사례1) 1962. 4. 18 사살 -  Kreuz Brueske

성명 : Kreuz Brueske

생년월일 : 1938. 9. 14

사살날짜 : 1962. 4. 18

사살장소 : Heinrich-Heine-Strasse 동독 검문소

범행내용 : Klaus Brueske는 23세로 직업은 운전기사였다. Brueske는 16세 Fleischer Lothar M.과 19세 Peter G.와 함께 1962년 4월 18일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세명의 청년은 화물차를 타고 Heinrich-Heine-Strasse에 위치한 검문소의 바리케트를 부수고 탈출하려 했다. 총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화물차 앞 부분에 모래를 실었다.

오후 1시 Klaus Brueske가 운전석에 앉아 바리케트 향해 질주하던 중 차량을 향해 정조준한 총탄들이 날아들었다. 차는 바리케트를 부수고 국경을 통과 서베를린 지역 250m를 달리다 담벼락을 들이박고 멈추었다. 2발의 총탄이 Brueske의 목에 관통했고 세 번째 총탄은 손에 맞았다. Brueske는 앞으로 곤두박질 쳤고 얼굴은 모래에 처박혔다. 중상을 입은 Brueske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목을 관통한 총알이 내출혈을 일으켰으나 즉사하지는 않았다. 사인은 질식으로 밝혀졌다.

동승했던 16세 Lothar는 어깨에 총격을 받았고 Peter는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사례2) 1962. 8. 17 사살 - Peter Fechter

성명 : Peter Fechter

생년월일 : 1944. 1. 14

사살일시 : 1962. 8. 17

사살장소 : Zimmer Strasse 베를린 미테(구에 해당)

범행내용 : 1962년 5월부터 18세 Fechter와 동료 Helmut는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생각을 해왔다. 두 청년의 가족이 서독에 거주하고 있었다. 두 청년은 베를린 원형 돔과 서베를린의 스프링거 출판사의 고층빌딩에서 멀지않은 건설현장에서 벽돌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현장은 옛 건물을 동독의 국가평의회 건물로 리모델링하는 곳이었다. 두 청년은 탈출계획을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았다. 탈출 바로 전날 그들은 베를린 미테 Zimmer 거리에서 탈출장소를 물색해 놓은 후 당일인 1962년 8월 17일 점심 시간을 이용해 탈출을 감행했다.

작업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두 청년은 Zimmer 거리로 창이 나있던 목공실로 진입할 수 있었다. Zimmer 거리는 서베를린과 연결되어 있던 곳이었다. Peter Fechter와 Helmut K.는 오후 2시 15분 목공실 창문에서 Zimmer 거리로 뛰어내렸고 첫 번째 철조망을 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흙 벽돌 위에 철조망을 얹어놓았던 서베를린 접경의 담벽을 향해 달렸다. 두 청년이 담벽에 다다르기 직전에 첫 번재 총격이 가해졌으나 총알은 빗나갔다. Helmut K.가 담을 넘어 뛰어내려 서베를린에 내려섰던 반면에 Fechter는 총격에 놀라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Helmut는 나중에 마치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총 35발이 발사된 후 다음 총알들이 Fechter의 복부와 등에 박혔고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중상을 입은 Fechter는 담벽 바로 밑에 쓰러져 피를 흘린 채 1시간이나 방치됐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서방의 언론인들과 경찰이 사닥다리에 올라가 죽어가며 도움을 요청하는 Fechter를 촬영했고 한 카메라 팀이 1시간이나 흐른 뒤에 동독 국경수비대에 의해서 시체가 운반되는 장면을 찍었다.

죽어가는 Fechter의 영상이 전세계로 전파됐고 수만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은 동독 공산정권의 비인간적 행태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미국 군인에게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위험이 있긴 하지만 죽어가는 청년을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 노력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성난 주민들이 장벽으로 향했으나 서베를린 경찰이 이를 저지했다.

                                                                                                IUED

 

 

                                 

 

통일 직후인 91년 잘츠기터(Salzgitter) 소재 중앙범죄기록소 (Zentrale Erfassungsstelle)가 지난 28년간의 동독 공산당 불법행위를 조사해온 자료집 '잘츠기터 보고서'를 발간했다.

 

                    

 

Peter Fechter, 당시 18세의 벽돌공은 친구와 함께 베를린 접경지역을 탈출하다 사살되고 말았다. Fechter는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린 채 1시간이나 방치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어 전세계의 관심을 촉발했다. 서베를린 주민들은 동독 공산당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

 

 

 

                   

 

서베를린 주민들이 장벽 근처에 Fechter에 대한 추모공간을 만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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