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언론의 북한 뉴스

독일판 사드 논쟁2

박상봉 박사 2017. 4. 24. 08:33

독일판 사드논쟁2

 

본 글은 필자가 2017.4.21일자 미래한국 인터넷판에 게재한 바 있다.


* 30년전, 나토 이중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이 없었다면 평화운동도 없었고 

녹색당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소비에트 연방도 여전히 건재했을 것이다, - 헬무트 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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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서독은 소련제 핵미사일 SS-20의 배치로 사회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독일판 사드 논쟁이었다논쟁은 1979년 12월 12나토가 슈미트 총리의 제안에 따라 이중결의안을 채택하며 촉발되었다.

나토 이중결의안은 소련이 동유럽에 현대화된 핵미사일 SS-20을 확대 배치하려면 나토와 협상해야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서유럽은 미국의 핵미사일 퍼싱 II와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소련은 최신예 핵미사일 SS-20을 동독 및 동유럽 전역에 확대 배치하고 있었다하지만 나토 이중결의안은 세계적인 사회운동이었던 평화운동과 정면 충돌했고 서독 정치권에서도 녹색당이 결성되는 등 군비 확장과 반전 운동이 거셌다심지어 사민당 내에서도 반 슈미트 그룹이 형성되기도 했다.

1981년 6월 20함부르크 개신교의 날 행사가 열렸다. 8만여 명의 군중이 결집해 전쟁반대핵미사일 배치반대를 외쳤다참가자 중에는 교사언론인은 물론 전역 군인들도 있었다.

1981년 10월 10일에는 수도 본에 전후 최대의 평화운동이 열렸다전국에서 버스 3000, 41편의 특별열차가 동원되었다기독교인평화운동가노조사회주의자학생청년 등 30만 명이 집결했다슈미트의 결정을 비난하며 평화는 무기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쳤다.

평화운동에는 좌우 구분이 없었다동독의 자칭 평화운동과의 연합도 이뤄졌다그 해 12동베를린의 한 호텔에 동서독 평화운동가들이 모였다동독과 서독의 작가 100명을 비롯해 예술인학자 등이 만남을 갖고 평화’, ‘군비축소’, ‘반전을 의제로 공동전선을 폈다이른 바 베를린 만남’(Berliner Begegnung)이었다이념으로 무장된 평화운동에 다름이 아니었다이 시기는 서독에서 좌파 무장단체인 적군파의 암약도 거셌던 때였다.

1983년 10월 22일 평화운동에는 전국에서 150만 명이 집결해 미국산 퍼싱 II와 크루즈 미사일의 서독 및 유럽 배치를 강력 반대했다. 109km에 달하는 인간 띠가 이어지기도 했다사민당 내 평화주의자 오스카 라퐁텐에곤 바와 같은 정치인들이 연단에 올라 슈미트를 규탄했다.

이런 국내외의 평화 공세로 서독은 소련과 7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타협에 나섰다하지만 SS-20은 동독에 배치되었고 신임 헬무트 콜 총리는 미국제 퍼싱 II와 크루즈 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결단을 내렸다연방하원은 1983년 11월 22찬성 286, 반대 225로 이를 승인했다대화론자 에곤 바는 왜곡된 사고의 상징이 빚어낸 참사라며 콜이 전쟁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이러한 평화 코스프레에 대해 독일의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디차이트(Die Zeit)는 2009년 12월 12일 "나토 이중결의안이 없었다면 소비에트 연방은 여전히 건재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행사에 콜 총리는 나토 이중결의안이 없었다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지도, 1990년 독일통일도 없었을 것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지도자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사례다.


2017년 봄서독에서 40년 전에 있었던 장면이 대한민국에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더욱이 미북 대치는 탄핵 후 탄생할 정권에 따라 어떻게 전개될지가 결정될 것이다동맹과 한 편이 되어 김정은의 버릇을 고칠 것인가?, 아니면 시누이 코스프레를 재연할 것인가대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과연 이 안보 위기를 헤쳐 갈 한국판 헬무트 콜은 누가될지과연 나타날 수는 있는 것인지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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