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패러다임과 북한재건

콜 총리 통일외교

박상봉 박사 2017. 4. 4. 08:51

콜 총리 통일외교


동독의 사태를 추적하며 통일의 자신감을 얻은 콜 총리는 대소(對蘇) 외교에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도 독미(獨美) 공조6)를 바탕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콜 총리는 물론 겐셔 외무장관은 수시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과 독일 문제를 협의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가운데 콜 총리는 1990716일 고르바초프와의 코카서스 정상회담에서 통일을 향한 가장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코카서스 지방 쉐제스노보드스크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는 겐셔 외무장관과 바이겔 재무장관이 콜 총리를 수행했다. 소련의 개혁 정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통일 이후 소련군 철수 및 연방군의 국방 문제에 관한 8개항에 대해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요 합의사항은 첫째,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시한을 4년 내로 명시함으로써 소련군 철수의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한 것이고 둘째, 소련은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4개 연합국의 지위를 상실함과 동시에 독일의 미래는 독일국민의 자율에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소련군 철수와 관련해서는 서독은 모든 철수 비용 일체를 지불하는 것은 물론 철수하는 소련군을 위한 소련 내 주둔 시설도 마련해주기로 했다. 또한 콜 정부는 소련의 개혁을 지원하는 대규모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더욱이 합의사항에는 주변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우려를 해소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통일 후 독일의 병력 규모,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내용과 주변국과의 영토문제를 담았다. 즉 독일은 통일 후 주변국에 대한 위협을 배제하고 평화에 기여하는 조치를 제도적으로 갖추며 통일로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물론 영국의 대처 총리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독소 합의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독일의 주권회복과 통일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영국과 프랑스는 198912월 두 차례 비공식 회담을 갖고 장차 태어날 독일의 괴물’(통일독일)을 저지하기 위한 공조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한 가운데 미테랑 대통령은 동독에서 치러질 자유선거에서 차라리 공산당이 승리하기를 바랐다는 후문이다.

19891220일 동베를린을 방문한 자리에서 공산당 지도부에 프랑스의 협조를 약속하는 등 통일에 대한 프랑스의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대처 총리는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의 진심을 확인한 후에는 통일된 독일은 나토에 잔류해야 할 것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심지어 양국 정상은 향후 독일 문제를 다루게 될 2+4회담(서독, 동독,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며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런 프랑스와 영국의 강공을 막아선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독일문제를 유럽안보협력기구(CSCE)에서 협의하자는 프랑스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했고 소련군을 독일에 계속 주둔토록 하자는 대처의 요구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유럽의 두 맹주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에 대한 콜 총리의 대응도 단호하고 신속했다. 유럽연합 과정에 가장 큰 장애 중 하나였던 유로화 도입에 대한 독일의 반대를 철회하고 향후 마르크화를 포기할 것임을 시사했다. 통일 문제에 골몰해 유럽연합 추진에 소극적이라며 서독을 비판했던 미테랑은 콜의 마르크화 포기를 수용하고 독일 문제에 대해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처 총리는 미테랑이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말았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미테랑의 동의에는 고르바초프가 통일독일이 나토에 잔류해야 한다는 대처의 요구를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고 소련이 동의한 합의사항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1990224일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콜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은 독일통일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콜 총리는 통일 후에도 독일은 친 서방정책을 이어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미국은 이어 19904월 미테랑과 대처를 설득해 전승국 지위를 포기하도록 했고 소련에는 군축협상을 제안해 유럽의 불안을 해소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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