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패러다임과 북한재건

대화의 주술에 걸린 통준위

박상봉 박사 2017. 3. 5. 16:56

대화의 주술에 걸린 통준위




대통령의 통일대박을 구체화하기 위해 설립된 통준위가 작년 초 남북대화를 제의하자 김정은도 신년사에서 남북 간 최고위급 회담도 가능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늘 그렇듯이 언론은 마치 남북대화가 재개돼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온 듯 호들갑이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거론한 회담의 전제조건을 가만히 뜯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김정은이 제시한 전제조건은 한미군사훈련 중단, 대북전단살포 금지, 제도통일 포기다. 한미군사훈련 중단은 안보 무력화를 위한 꼼수이며, 대북전단살포 금지는 자유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공격이요, 제도통일 포기는 헌법의 폐기이자

적화통일을 위한 포석이다.

미국은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면 핵실험도 중단하겠다는 주장을 궤변이라고 일축하고 이것은 북한의 암묵적 위협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달리 우리 정부는 또 다시 대화타령,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대화만하면 북한과 동계올림픽도 가능하다고 맞장구치다 철회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북한의 2015104일 목함지뢰 도발과 8.25 합의에 대해서도 통일부나 언론의 반응은 민망스러울 정도로 자기합리화 일색이었다. 한마디로 남한이 승리한 회담이었다는 자평이었다. 하지만 합의사항 어디에도 북한이 사과를 했다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북한이 향후 남북대화에 적극 임할 것이라고 해설을 늘어놓고 있지만 이것도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독일의 주요 언론은 북한이 이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고 보도했을 뿐 북한이 지뢰를 매설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시사주간지 포커스(FOCUS)는 북한의 조선중앙 TV를 인용해 “8.25 합의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핵무기의 위력으로 가능했다는 김정은의 발언을 보도한 바 있다.(2015.8.28.)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만하다. 문제는 통일을 둘러싼 책임자들의 인식이 안이하다는 데 있다. 통일 지상주의라고 할까, 통준위 부위원장의 발언은 통일의 가치는 고사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정신마저 훼손해 보인다. “흡수통일은 비현실적이다. 통일을 1국가 1체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며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기 위해 간도 쓸개도 다 내줄 태세였다. 대화만 하면 5.24 조치도 해제할 수 있으며, 통일도 풀어낼 수 있다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렇게 이루는 통일이 과연 통일대박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해 10월초 한 인터넷 언론 창간 포럼에 참가했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당신이 김정은이라면 북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당시 포럼의 분위기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북한과 통일을 이룬다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북한을 도와 일정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루도록 한 후 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북한에 새마을운동과 같은 사업을 이식해 대동강 기적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야말로 대화를 통한 남북 경제협력을 이루고 통일하자는 맥락이다.

내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자 장내 분위기는 순간 차갑게 가라앉는 듯 했다. “제가 만약 김정은이라면 우선 남한이 제시하는 경협의 손길을 넙죽 잡고 대동강 기적을 이룬 후 본격적으로 남한 접수에 나설 것입니다.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 군사강국이 대동강 기적을 통해 경제력도 확보한다면 남한 정도를 먹어 치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남한의 꼴을 보십시오. 종북 콘서트로 물의를 빚어 사법당국이 추방한 신은미를 한 언론이 나서 통일문화상을 수여하는 나라입니다.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시민단체들이 이름만 바꾸어 버젓이 활동하는 나라입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이라고 하지만 오합지졸 아닌가요하기야 천안함 폭침을 아직도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믿고 전파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니 이런 허구와 궤변이 통용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남북대화가 요술램프가 아님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해서도 증명된 바 있다. 오히려 북한의 비정상적 태도에는 원칙적인 대응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때에도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도 대화라는 주술만 반복한다. 이러니 북한과의 샅바 싸움은 연전연패다. 급기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대북전단살포 중단 결의안을 채택하고, 통일부는 전단살포를 제지하며 북한 달래기에 앞장선 바 있다.


독일통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분위기도 가관이다. 전 세계가 독일통일을 현대사의 기적이라고 보고 있다. 동독과 서독이 단계적으로 통일협상을 추진해 이뤄낸 평화적인 합의통일을 흡수통일의 틀 속에 가두는 것도 의아하다.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은 총 6차례 정상급 회담을 개최했다. 1, 2차 회담은 브란트 정권 하에서 19703월과 5월에 동독 에어푸르트와 서독 카셀에서 순차적으로 열렸다. 분단 25년 만의 일로 동방정책의 일환이었다. 3차 회담은 슈미트와 호네커 정상의 대화로 198112월 동베를린에서 있었다. 2차 회담이 열린지 11년만의 일이었다. 동독이 고정간첩 기욤을 통해 총리실을 도청하고 비밀자료들을 빼돌렸던 사실이 적발돼 브란트가 총리직을 사임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차 정상회담은 새로 집권한 기민련의 콜 총리가 호네커를 본으로 초청해 이뤄졌다.

콜은 1982년 집권 후 전임 총리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분단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1983년과 1984년에는 19.5DM을 동독에 지원했고 호네커는 국경에 설치된 자동기관단총을 철거했다. 동독의 양심범이나 노약자들의 서독 이주의 길도 대폭 열어놓았다. 문화, 스포츠, 교통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교류와 협력도 활발했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식 교류 협력이 아니라 쌍방향 교류와 협력이었다.

5차 회담은 19891219일 콜의 드레스덴 방문 후 이뤄졌다. 5차 회담은 과거 4번의 회담과 달리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호네커가 실권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에 이뤄진 회담이었다는 것과 최초로 통일을 의제로 다뤘다는 것이었다. 동독 공산정권의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모드로브 총리는 콜에게 통일 카드를 제시하며 경제적 지원을 얻고자 했다. 독과 서독이 조약공동체를 거쳐 통일국가를 만들어 가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콜 총리는 모드로브의 제안을 거절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재확인했다. 핵심은 향후 통일 문제를 포함한 동독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해 민주적 지도자를 선출하라는 것이었다.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모드로브 총리는 콜의 역제안을 수용해 1990318일 자유총선을 실시했다. 동독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로 공산정권을 대체할 민주권력을 창출하는 순간이었다. 이 선거에서 드메지어 총리가 선출됐다.


콜 총리는 1990424일 본에서 드메지어 총리와 6차 정상회담을 열고 본격적으로 통일협상을 추진하게 됐다. 이상 6차례 정상급 회담을 보면 1~5차 회담은 분단으로 인한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였으며 통일을 의제로 한 만남은 6차 회담이 유일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공산권력과의 회담은 분단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고,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통일은 민주적 절차로 창출된 정권과 논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대화를 통해 통일문제를 포함한 남북 간 모든 현안을 논의해 평화통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동일한 체제 내 여야 영수회담도 온갖 잡음과 다른 해석이 난무했는데 어설프기 짝이 없다. ‘통일대박에 대한 북한의 대답은 ‘2015 통일대전이었고,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거론하는 통일이 같을 리 없어도 책임자들은 대화를 방패삼아 은신해왔다.

이런 와중에 북한이 또 다시 핵 도발을 감행했다. 201616일 새해벽두에 4번째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8.25 합의에 도취되어 있던 박근혜 정부의 뒤통수를 내린 친 셈이다. 불과 한 달 여전 북한이 수소폭탄을 개발할 것이라고 공언했을 때도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국민은 정부가 늘 공언해왔던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를 원한다. 대북확성기를 가동하고 미국의 B-52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을 비행하는 등 북한을 위협하다 북한이 다시 대화의 손길을 내밀면 감지덕지 그 손을 덥석 잡고 남북대화라는 마법으로 회귀하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대화는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여야 지도부가 국회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를 했어도 끝나고는 서로 딴소리로 난리다. 하물며 생떼와 벼랑끝 전술로 세습정권을 유지해온 북한과 대화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몰아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남북대화 무용론을 제기하면 그러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다그칠 때는 할 말이 없다. 북한은 이런 남한의 대화론을 역이용하고 있다. 마치 함진아비가 돈 봉투를 밟아야 한 발 짝을 내딛듯이 평양 발걸음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서독은 분단 시절 동독에 대화를 구걸한 적이 없다. 오히려 동독이 서독에 접근하며 돈도 벌고, 힘도 키웠다. 오늘날과 같은 한반도 상황 하에서 남북대화는 북한이 먼저 나서서 대화를 구걸할 정도가 되어야 효과가 있다.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