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고르비(Gorbi), 호른(Horn)과 시진핑(Xijinping)

박상봉 박사 2015. 10. 6. 21:35

고르비(Gorbi), 호른(Horn)과 시진핑(Xijinping)

독일과 남한의 통일외교

 

- 고르비, 독일의 연인

1989년은 독일 현대사의 하이라이트이자, 민족 최대의 시험대였다. 분단통일을 가르는 역사의 전환기였으며 고르바초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독일의 운명이 좌우되는 시기였다.

1989107,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 동베를린을 찾았다. 당시 동독은 주민들의 저항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민들은 매주 월요일 거리로 몰려나와 “Wir sind das Volk!"(우리가 국민이다), ”Stasi raus!" (슈타지는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94일 불과 1천명으로 시작했던 월요데모는 101612만명으로 급증했다. 월요데모 7번만의 일이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 호네커는 무력진압작전을 계획했고 이 와중에 고르바초프를 맞게 되었다. 건국절 열병식에 이어 군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에 기대어 꺼져가는 공산당의 불씨를 되살릴 것을 기대했다. 연단에 오른 호네커는 사회주의 깃발을 더 높이 치켜들고 시위대와 동독 탈출자들을 향해서 배신자는 조국을 떠나라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변화를 주문했다.

고르바초프의 주문은 마법처럼 동독은 물론 국제사회를 큰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123, (SED)이 호네커를 제명한 것이었다. 독일의 미래를 바라보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은 예상 외로 컸다. 독일의 미래를 독일민족에게 맡기자고 했던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이런 고르바초프에게 독일은 고르비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아내 라이사가 암 투병할 때는 서독으로 모셔와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

 

- 가치 공유 vs. 좋은 이웃

동독의 전환기, 막연했지만 통일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은 헬무트 콜 총리였다. 그는 8월부터 시작된 동독의 급변 상황을 매일 빠짐없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공유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정확히 읽은 것은 물론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미국은 서독의 진심어린 외교적 노력에 무한 신뢰를 보내주었고 유럽 지역에 평화의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미소 정상이 1989123일 몰타에서 군축회담을 개최한다고 발표하는 한편, 미국은 소련의 개혁개방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서독도 좋은 이웃에 재정적 지원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중국 방문은 미국과 서방세계에 어떤 이미지를 전달했는지 걱정이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과 인권, 자유, 민주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인지를 묻는 것이다, 통일대박이라는 경제적 이익만을 앞세워 서구 문명국가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가치들을 소홀히 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면 통일외교의 실패다. 한미동맹은 군사동맹을 넘어 60여년 동거동락(同居同樂)을 통해 경제동맹, 가치동맹으로 발전했다.

 

- 기율라 호른,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준 은인

고르비가 독일의 연인이라면 헝가리 호른 외무상은 철의 장막의 빗장을 열어젖힌 인물이다. 동독 혼란기, 해외 탈출도 이어졌다. 서독 대표부는 물론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에는 동독 탈출자들로 가득했다.

이런 와중에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헝가리가 범유럽 유니온의 평화 축제 행사를 위해 오스트리아 국경을 서너 시간 개방하자 동독 청년 600여명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서독 정부의 외교적 총력전이 벌어졌다. 서독은 국경을 상시 개방할 것을 요구했던 반면, 동독은 1969년 헝가리와의 통행협정을 근거로 개방 불가를 원했다. 개방할 경우 사회주의 동맹과 외교관계는 단절될 것임을 상기시켰다. 체코, 폴란드 등 국경도 전면 폐쇄했다.

이런 동서독 사이의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은 서독의 승리로 끝났고 헝가리 정부는 911일 국경 개방을 선포했다. 호른은 독일 통일 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어려운 심정을 장문의 고백에 담기도 했다. 그의 저서 “Freiheit, die ich meine"(내가 생각하는 자유)에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기까지 헝가리의 결단의 순간이 잘 기술되어 있다.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던 것과 막상 빗장을 열어젖히는 것은 전혀 달랐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용기가 독일 통일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이 결정이 있은 후 1달여 만에 24천여명의 동독 주민이 이 루트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 시진핑, 2의 고르비 & 호른

지난 93일 전승절 군사굴기(軍事屈起)의 모습과 달리 중국의 민낯은 딜레마로 얼룩져 있다. 왜곡된 투자로 유령도시가 생겨나고 성장률 하락으로 농민공의 시름과 불만은 가중되고 있다. G2라고 하지만 13억 인구 중 10억 인구는 하루 3~6달러로 살아가고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구도 2억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장 위구르, 티벳 등 55개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폭력과 테러를 양산하고 있으며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개 나라들은 모두 중국과 분쟁을 빚고 있다.

20년 후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주장은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중국은 대국, 남한은 소국이라는 패배주의적 사고는 끝났다. 우리가 중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 중국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빨리 적응할 때다. 올해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위기를 맞았다. 주가 급락에 마지노선으로 여기던 7%대 성장률 달성이 어려워졌다. 정부의 백약이 무효했다. 시진핑은 보다 과감한 정치적경제적 개혁과 개방 없이는 중국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1980년대 소련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이때가 우리가 중국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고 G2에 걸맞는 역할을 유도해 나갈 절호의 순간이다. 독재자, 장기집권자, 학살자 등 그들만의 2부 리그를 끝내고 인권, 자유, 민주 등 인류 공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G2로 탈바꿈하도록 도와주자. 선택은 시 주석의 몫이다. 시진핑이 제2의 고르바초프, 2의 호른으로 거듭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는 21세기 기회의 땅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