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독일의 통일외교: 헝가리

박상봉 박사 2015. 6. 17. 12:41

헝가리의 반란/ 중국의 반란

 

1989년 여름 본격적인 동독 엑서더스가 시작됐다. 라이프치히(Leipzig) 월요데모 (Montagsdemonstration) 반복되면서 집단적 탈출이 본격화됐다. 8월 8일 동베를린 서독 대표부에는 131명의 동독인이 들이닥쳤다. 이어서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서독 대사관에 동독인이 몰려들었다. 대사관 뜰은 탈출자를 수용할 텐트가 빼곡히 들어섰다. 여름 어느 날 600여명의 동독 청년이 헝가리를 경유해 오스트리아로 몰려들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있었던 평화축제 행사에 참가했던 동독 청년들이 탈출한 것이었다. 이 행사는 범유럽 유니온(Pan-Europa Union)과 헝가리 인권단체가 주관한 것으로 600여명의 동독 청년이 참가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동독 청년들은 모두 서독 행을 요구했다.    

 

콜 총리는 즉시 겐셔 외무장관을 파견해 헝가리 정부와 담판을 벌여 전원을 서독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동독 정권도 긴급히 움직였다. 동독 외교부는 헝가리와 사회주의 형제국임을 강조하며 오스트리아 국경을 폐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개방하면 전통적인 우방국 외교관계도 단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서독 사이에 21세기 최대의 외교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이 외교전쟁은 서독의 승리로 끝났다. 헝가리 네메츠 정부가 서독의 요구에 따라 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키로 결정했던 것이다. 1989년 9월 11일이었다.

 

이 일은 독일통일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개방 한 달만에 동독인 2만4천여명이 이 루트로 서독 땅을 밟았다. 당시 헝가리의 국경개방은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외무상 기율라 호른(Horn)은 독일통일 후 슈피겔(Spiegel)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어려웠던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Freiheit, die ich meine”(내가 생각하는 자유)에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키로 한 역사적 결단의 순간이 잘 기록되어 있다. 체코 프라하와 폴란드 바르샤바 서독 대사관에 진입한 동독인들도 무사히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제3국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인이 무려 50만명에 달했다. 탈출자를 막고자 했던 베를린 장벽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고 1989년 11월 9일 28년간 동과 서를 가르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헝가리의 반란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을 떠나는 순간 헌법 상 대한민국 국민이다.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헌법도 준수하지 못하고 국가나 통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 또한 2천4백만 인구의 북한과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나라가 수십만 탈북자를 돌보지 못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들이 한국의 정책에 신뢰를 보내기가 어렵다. 우리가 탈북자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보일 때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 크게 깊어질 것이다. 중국에 대한 우리의 비판도 그럴 때 보다 떳떳할 것이며 중국의 반란도 그때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