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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과정과 시민단체 :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지도자

박상봉 박사 2014. 12. 11. 21:48

   독일통일과정과 시민단체: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지도자



   사진 : 좌로부터 메르켈 총리, 가우크 대통령, 비어틀레 슈타지 문서관리청장


동유럽 체제전환 과정에서도 그렇듯이 독일통일과정에서 시민운동은 동독 무혈혁명과 통일을 엮어낼 수 있는 유일한 끈이다. 동독 공산정권 말기 분출하는 주민들의 요구를 결집해 원탁회의를 결성해 호네커를 몰아낸 힘, 베를린 장벽을 해체시키고 동독에 자유선거를 실시해 민주적, 합법적인 통일의 기초를 마련해낸 일련의 사건들의 뿌리에는 늘 시민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무혈혁명의 주역: 시민운동

 

독일통일은 시민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빼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통일과 관련해 동독에서 일어난 시민운동의 효시는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회(Friedensgebet)였다. 1981년 시작된 평화기도회는 작은 교회 기도운동에 불과했다. 동독 정권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로하는 소박한 평화기도회가 공산당에 대한 저항운동의 메카가 된 것은 1988년이었다. 교회 속 기도회가 교회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 시위의 출발점은 늘 니콜라이 교회였다. 공안당국은 니콜라이 교회를 집중 감시했고 교회를 포위해 시위를 막는 일도 있었다.

니콜라이 교회 평화기도회는 공산정권의 감시 하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1989년 가을부터는 본격적인 저항운동으로 변화되었다. 89년 9월 4일 월요일, 기도회를 마친 1천여명의 주민들이 “Stasi raus! 슈타지 사라져라!”라며 거리로 나섰다. 서독 여행을 막으면 탈출도 불사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컸다. 슈타지의 무력진압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70여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월요일마다 더 많은 주민들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은 이 모임을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로 불렀다. 10월 9일 월요데모에는 7만명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들은 ‘gewaltlos 비폭력’을 연호하며 슈타지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베를린 겟세마네 교회도 저항운동에 동참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데모가 베를린,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 월요데모는 통일운동의 획을 그었다. 무려 12만명이 참가했다. 시위구호도 변했다. 우리가 “주권을 가진 국민이다”라는 의미의 “Wir sind das Volk!”가 통일을 요구하는 “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한 민족이다!”로 바뀌었던 것이다. 저항운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변하고 통일운동으로 승화되어 갔다. 다른 한편 폴란드나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에 진입한 동독주민들의 탈출 소식이 전해지며 시위대의 사기도 고조되었다.


대내외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지만 호네커(Erich Honecker)의 오기는 극에 달했다.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만 매달려 있었다. 건국 행사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도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고르바초프는 40주년 축하연설에서 호네커의 기대와는 달리 “Wer zu spae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삶은 시기를 놓친 자를 벌할 것이다”라며 개혁을 설득했다. 하지만 호네커는 연설에서 “과거 40년 동안 동독이 이룩한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동독인의 탈출과 반공 시위는 서독 정부의 흑색선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독 공산당도 이해할 수 없는 연설이었고 결국 당이 나서서 호네커를 출당시키고 서기장과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박탈했다. 사통당 정치국은 1989년 11월 8일 자로 폐쇄되었다.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

 

호네커가 축출되고 공산당이 약화되자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시민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뉴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 지금’ (Demokratie Jetzt), ‘민주봉기’(Demokratischer Aufbruch) 등이 생겨나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지금’은 1989년 9월 12일 민주주의 개혁과 주민의 정치참여를 모토로 내걸고 설립되었다. 민주주의 지금은 사통당, 교회, 시민운동, 위성정당 등이 참여하는 ‘4자 회의 (Vierseitiger Tisch)’를 열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이것이 후에 ‘원탁회의’로 발전했다. 또한 사통당(SED)의 주도적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동독 헌법 1조를 개정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2달 만에 7만5천명의 서명을 모았다. 민주주의 지금은 1990년 1월 정치 참여를 공식 선언하고 3월 18일 자유선거에 동맹 90의 일원으로 출마했다. 

‘민주봉기’는 1989년 10월 시민단체로 조직되었고 12월에는 창당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고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총재에는 변호사 볼프강 슈누어(Wolfgang Schnur)가 선출되었다. 민주봉기는 정당 프로그램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추구할 것과 정당의 목표로 통일을 내세웠다.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지 못했던 리더들이 떠나고 반공 개혁주의자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 대변인, 오스발드 부츠케(Oswald Wutzke)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민주봉기는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 기민련(CDU), 독일사회연맹(Deutsche Soziale Union)과 독일연합(Allianz fuer Deutschland)을 결성해 출마했다. 선거결과는 독일연합에 공동 참여한 기민련(40.8%)이나 독일사회연맹(6.3%)에 비해 저조한 득표율인 0.9%를 기록했다 

동독 급변기에 조직된 시민운동 중 가장 두드러진 단체는 ‘뉴포럼’이었다. 뉴포럼은 “항아리를 넘치게 한 마지막 물한방울(Tropfen, der das Fass zum Ueberlaufen brachte)”이라는 정의에서 나타나듯이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의 절정으로 공산당을 몰락시키는데 최후의 일격을 가한 시민단체였다. 니콜라이 교회와 겟세마네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이 교회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라고 한다면 뉴포럼은 교회 밖에서 시작된 최초의 전국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뉴포럼은 동독의 전환기인 89년 9월 9일 전국 11개 지역에서 30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됐다. 대표적 반체제 인사이자 1982년 타계한 화학자 로베르트 하페만(Robert Havemann)이 거주했던 그륀하이데 자택에서 참가자들은 ‘봉기 89 (Aufbruch 89)’ 선언을 채택하고 공동서명했다. 봉기 89는 당시 상황을 국가와 사회가 불통해 주민들 고통이 심하고 탈출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동독 헌법 29조인 규정한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찾기 위해 시민들이 일어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모임은 결성 초기부터 당과 슈타지의 표적이 되었고 모든 일정이 슈타지 보고문서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반체제 인사였던 베어벨 볼라이(Baerbel Bohley), 옌즈 라이히(Jens Reich) 등 많은 인사들이 블랙리스트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현장에 가담했다. 참가자들은 또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 체코의 헌장 77과 같은 개혁 시민운동에 크게 고무되었다. 30명의 창립 발기인들의 집에는 연인 동참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창립 선언 'Aufbruch89'에는 2달 만에 20만 명이 서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독주민들의 시민운동은 독일통일과정에 다음의 두 가지 결실을 맺었다. 하나는 동서를 물리적으로 가로막았던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탁회의(Runder Tisch)’라고 하는 시민운동 연합체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 원탁회의(Runder Tisch)

원탁회의는 호네커 실권 후 총서기에 오른 크렌츠 집권기인 1989년 12월 7일 정식 발족되었다. 정치적 격변기에 동독 무혈혁명을 주도했던 시민단체와 교회 대표들이 주 멤버였다. 원탁회의는 동독 격변기 실질적인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자 개혁공산주의자로 총리에 오른 모드로브는 1990년 1월 28일 정부도 원탁회의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이후 국가 통치는 원탁회의와 모드로브 정부의 이원체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원탁회의는 공산당 SED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다양한 정치활동을 보장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당의 창과 방패로 공산권력의 시녀였던 슈타지의 해체를 공론화하고 헌법 개정과 조속한 시일 내에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동독 땅에 최초로 자유 민주선거가 전격 실시되었다.

 

동독 최초 자유선거: 시민운동의 대단원

 

자유선거의 동독 유권자는 총 1,220만명이었고 시민운동가들이 대거 입후보했다. 위성정당이었던 동독 기민련, 사민당, 독사련, 동맹90에도 시민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원탁회의를 주도했던 뉴포럼, 민주주의 지금은 다른 시민단체인 ‘이니셔티브 평화와 인권’(Intiative Frieden und Menschenrechte)과 함께 ‘동맹 90’을 결성해 선거에 나섰다. 민주봉기는 동독 기민련과 독사련(서독 기사련과 유사)과 연합해 ‘독일연합’(Allianz fuer Deutschland)을 결성했다. 동독 위성정당 LDPD, 독일포럼정당 DFP도 ‘자유민주연대’를 만들어 출마했다. 이밖에 동독 사통당 후신인 민사당(PDS)도 출사표를 던졌다.

 

- 선거 최대 쟁점: 23조 vs 146조

선거의 최대 쟁점은 통일문제로 어떤 통일을 추진하며 어떤 속도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동독 기민련 CDU은 서독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서독 통일을 추진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에 반해 동독 사민당 SPD은 기본법 146조에 따라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통일을 완성한다는 입장이었다. 기본법 23조는 동독은 서독 기본법 효력 범위에 편입됨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규정이다. 사통당 후신인 민사당은 동독과 서독이 1:1로 국가연합을 구성하자고 주장했고 동맹 90은 단계적 통일방안을 내세웠다.


선거결과 동독주민들은 독일연합에 48%, 사민당에 21.9%, 민사당에 16.4% 그리고 동맹 90에는 불과 2.9%의 표를 던졌다. 독일연합의 선거 포스터에는 통일반대론자들에게 기회를 주지말자는 구호와 함께 ‘사회주의여 안녕’(Nie wieder Sozialismus)을 전면에 내세워 압승을 거뒀다. 선거결과 압승한 ‘독일연합’의 기민련(득표율 40.8%)은 로타 드메지어를 중심으로 사민당(득표율 21.9%)과 자유민주연대(득표율 5.3%) 등을 묶어 대연정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부총리 겸 대변인에는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 임명되었다. 드메지어 정권은 통일을 전제로 현안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서독과의 화폐·경제·사회통합, 슈타지(Stasi) 해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동독 인민의회는 1990년 8월 23일 임시의회를 열고 10월 3일을 기해 서독 연방에 편입할 것을 결의했다.


동독 마지막 총리 드메지어는 1990년 10월 2일 통일 전야제에서 “이별은 슬픔을 의미하지만 동독과의 이별은 기쁨이요 희망”이라고 연설을 하고 임기를 끝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상임지휘자이자 월요데모의 주역이었던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했다. 다음 그림은 동독 자유선거 결과이다.

 

  그림설명: 동독기민련CDU, 동독사민당SPD, 민사당(동독사통당 후신)PDS, 독사련(서독CSU 자매당)DSU, 자유민주연대BFD, 동독동맹‘90(서독녹색당 자매당)Buendnis90 등이 2% 이상 득표율을 기록했다.

 

-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지도자로

 

통일과 함께 동독 무혈혁명을 이끈 시민운동가들은 정치지도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메르켈은 1954년 7월 17일 우리나라 제헌절에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신학자였던 부친은 메르켈 출생 후 바로 동독으로 이주 브란덴부르크 주 한 마을에서 목사가 되었다. 물리학을 공부한 메르켈은 1989년 동독 무혈혁명 당시 민주봉기의 일원으로 시민운동에 헌신한 후 헬무트 콜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통일 직후 1990년 12월 2일 전체 독일에서 실시된 연방하원(Bundestag)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콜의 4기 내각(1991-1994)에서 여성 청소년부 장관을 지냈고 5기 내각(1994-1998)에서는 환경부 장관을 지내며 콜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98년 이후는 기민련(CDU)의 사무총장을 지내며 정치적 역량을 축적했다. 1999년 콜 총리가 정당기부금법에 저촉되어 조사를 받게되었을 때는 콜의 탈당을 요구해 당을 수습하고 리더십을 확고히했다. 이후 양아버지로 여겼던 콜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메르켈은 2000년 4월 10일 당대표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선거에서 패배해 사민당이 집권하게 되었고 2005년 연방총리로 선출될 때까지 야당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연방총리로 선출된 후 메르켈은 대내적으로는 동독재건, 대외적으로는 유럽통합을 이끌며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2009년 연임에 이어 2013년 3선에 선출되는 기염을 토했다.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 대통령은 동독시절 목사로 1989년 뉴포럼에 참여해 무혈혁명을 이끌었다. 1990년 6월에는 슈타지 해체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통일 후 슈타지 문서관리청(일명 가우크청) 대표로 선임되었다. 2012년 3월 18일에는 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지금까지 독일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볼프강 티에르제(Wolfgang Thierse)는 동독 튀링겐 주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훔볼트 대학에서 독문학과 문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티에르제는 대학 연구소에서 활동하다 문화부로 이직했다. 문화부에서 일하던 티에르제는 1975년 동독 반체제 인사 비어만(Biermann)의 시민권 박탈에 서명하라는 지시를 거부해 퇴직해야 했다. 동독 무혈혁명 때에는 뉴포럼에 참여해 활동하다 동독 사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6월 9일에는 동독 사민당 대표로 선출되었고 통일 후 동서독 사민당 통합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티에르제는 1998년-2005년까지 연방하원 의장, 2005-2013년까지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만프레드 슈톨페(Manfred Stolpe)는 동독 개신교 장로로 정치범들을 돕고 서독으로 이주시키는 활동하다 통일 후 동독 브란덴부르크 주 지사로 선출된 인물이다. 동독 시절 대부분을 슈톨페는 동독 개신교 연맹 사무총장과 부총재로 활동하다 통일 후 동독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1990년 브란덴부르크 주지사에 당선되어 2002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2002-2005년 연방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이외에도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 자유선거를 통해 총리로 선출된 로타 드메지어, 현재 슈타지 문서관리청장인 마리안네 비어틀레(Marianne Birthle) 등이 동독 출신 시민운동가로 통일독일을 이끌고 있는 인물들이다. 동독 변호사 출신인 로타 드메지어는 동독 마지막 총리가 되었고 통일 직후 콜 내각 특임장관을 지내다 구동독시절 슈타지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던 사실이 밝혀져 정치를 떠나야 했다.

이와 같이 통일 후 독일은 동독 무혈혁명을 이루어낸 시민운동가들을 키워 정치무대에 데뷔시켰다. 다른 한편 이것이 독일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통일 후 오시즈-베시즈 하며 동서 갈등과 같은 부작용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독일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동독을 중심으로 독일에 불고 있는 좌파당(Die Linke)의 약진은 통일 후 지역감정의 골이 얼마나 크고 공산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항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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