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이해 오해

동독 급변기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Konrad-Adenauer-Stiftung)과 정치교육

박상봉 박사 2012. 12. 4. 13:07

동독 급변기,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Konrad-Adenauer-Stiftung)과 정치교육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KAS)은 1955년 설립되었다. 평화, 자유, 정의를 기본 이념으로 민주주의 기본질서 유지와 발전을 위한 정치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동독에 급변사태가 발발하자 아데나워 재단은 동독팀을 결성해 혼란기로부터 통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추적하였다.

 

 

1. 1990년 격변기 프로그램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 동독은 최대 혼란기를 맞았다. 동독탈출이 이어지고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반 사통당, 통일의 구호가 퍼졌다. 독일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주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KAS)의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아데나워 재단은 동독팀을 구성해 동독 현장에 파견했다.

월요데모 현장을 영상에 담고 민주화 과정을 관찰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원탁회의에 참여해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교회 및 시민단체의 지도자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변화의 과정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자문역이 되었다. 1990년 1월에는 변화의 영웅 라이프치히에 동독 최초의 콘라드 아데나워 사무소를 개원했다. 이어 동독 5개주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책임자를 두었다. 그리고 1991년에는 막데부르크에 위치한 벤데그라벤 성(Schloss Wendegraben)을 매입해 중앙 연수원을 오픈했다. 벤데그라벤 성은 서독 아이히폴츠 성(Schloss Eichholz)에 이어 두 번째 중앙연수원이다. 초기 아데나워 재단은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선정해 정치 초년생들과 교사, 학생, 청소년, 경찰들에게 새로운 체제 하에서 민주시민으로 갖춰야할 소양들을 교육했다.


가. 정치초년생 지원 프로그램: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동독 혼란기 동독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아데나워 재단은 무엇보다 자유선거를 성공적으로 도입해 실시하는 것이었다.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만나 사태의 추이를 분석하고 향후 일정을 논의했다. 시민 지도자들에게 민주주의에 있어 선거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교육했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 일정을 함께 논의하고 국가의 본질, 법치국가에 자문해주었다. 특히 교회 밖 최초의 시민운동이었던 뉴포럼(Neues Forum)과 민주봉기(Deutscher Aufbruch)의 조직과 정당활동을 자문해 주었다. 민주봉기는 현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배출한 당으로 선거 후 기민련과 합당했다. 이들 단체의 창당 선언문에는 아데나워 재단의 가치가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정치 초년생에 불과했다. 사통당 일당 독재체제에서 성장한 이들을 상담해주고 자문해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아데나워 재단은 이들 정치 초년생들에게 의회정치 하에서의 의사결정과정, 예산의 편성과 집행 그리고 전문지식의 활용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자문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일반주민들의 관심이 일상생활의 문제로 이전되었다. 실업문제, 환경, 육아와 관련된 문제를 상담해주고 동서독 주민들의 동질감 확대와 이질감 해소를 위한 여러 행사도 겸했다. 세미나, 토론회에 사람들이 몰렸고 상담 창구는 늘 붐볐다.


나. 지방자치제도 교육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와 5월 5일 지방자치선거 결과 일시에 많은 정치초년생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의회주의, 정당정치, 법치주의 등 모든 것이 생소했다. 아데나워 재단은 민주정치,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 및 민주사회의 다양한 제도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매회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세미나가 끝나면 추가 질문이 폭주했다.

초기 세미나나 교육은 서독의 아데나워 재단에서 이루어졌다. 동독에서 행사를 치르기에 관련 시설이 미흡하고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독 참가자 및 교육생을 배려하고 동서 간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로 관련 행사에는 서독인을 동참시켜 운영하기도 했다. 세미나 및 교육의 단골 주제는 역시 민주주의 기본질서, 시장경제, 법치국가들이었다. 하지만 참가자에 비해 행사가 적어 홍보용, 교육용 책자를 만들어 분배해야 했다.


다. 역사적 증인과의 대화


과거 동독의 폐쇄적 사회를 경험했던 산증인들은 학생, 청소년들에게 많은 교훈이 된다. 동독 급변기의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과 청소년들이 만나 대화를 통해 시대적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동독 청소년은 물론 서독 청소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다. 직접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며 교육 효과는 매우 크다.

다음은 학생들과 동독 국경수비대원이었던 Manfred Z.의 대화내용이다.


Q) Wann wurden Sie geboren? 태어난 곳은 어디입니까 ?

-> „ Ich wurde am 13.August 1956 in der DDR geboren.“ 1956년 8월 13일 동독에서 태어났습니다.  

Q) Wie alt waren Sie als die Mauer gebaut wurde?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당시 몇 살이었습니까 ?

-> „ Als die Mauer gebaut wurde war ich 5 Jahre alt“ 5살 이었습니다.

Q) Haben Sie den Mauerbau überhaupt schon richtig wahrgenommen? 베를린 장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

-> „ Nein, nicht wirklich. Ich war ja auch noch sehr klein.“ 없었네요, 당시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Q) Hat der Mauerbau sie mit Freunden, Verwandten oder ihrer Familie auseinandergerissen? 장벽으로 친구, 친척이나 가족들이 흩어졌나요?

-> „Ja leider, mit meinem onkel, meiner Tante und noch vielen Freunden.“ 네, 삼촌과 이모 그리고 여러 친구들과 헤어졌습니다.

Q) In welchem Teil Deutschlands haben sie denn früher gelebt? 어린 시절 독일 어디에서 사셨습니까 ?

-> „Ich habe als Kind in der damaligen DDR gewohnt, am Alexanderplatz, Mit 18 Jahren bin ich dann in den Westen geflüchtet.“ 어린 시절 구 동독 알렉산더 광장 부근에서 살았습니다. 18살 때 서독으로 탈출했습니다.

Q) Hätten sie vielleicht lieber in einem anderen Teil Deutschlands gelebt? 서독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까 ?

-> „ Als Kind fand ich den Osten ganz OK, doch als ich dann älter wurde,  wollte ich natürlich im Westen leben.“ 어릴 때 동독이 좋았는데 나이가 들자 서독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Q) Gab es irgendwelche Vor- und Nachteile ihrer Meinung im Osten? 동독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입니까 ?

-> „Ja, also Nachteile gab es schon ziemlich viele wie zum Beispiel kein Fernseher (wenn man einen hatte konnte man nur Ostfernsehen sehen), kaum Telefon, wenig Obst und nicht so viel zu Essen. Vorteile gab es aber auch, wir haben zum Beispiel mehr Sport in der Schule gemacht und  eine gute Erziehung gab es auch.“ 단점요 너무 많죠, TV도 없었고 전화기도 드물고 채소와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Q) Haben sie noch Erinnerungsstücke an die Zeit im Osten? 동독 시절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

-> „Ja, ich habe ein Foto wo ich Grenzsoldat bin, weil ich mit 17 Jahren Grenzsoldat war. Ich habe auch noch meinen Lehrvertrag und meine Zeugnisse.“ 17살에 국경수비대가 되었고 그 시절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학습표와 성적표도 있습니다.

Q) Sie sind doch damals aus dem Osten nach Westen geflüchtet, könnten sie mir dazu vielleicht was erzählen?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했는데 그와 관련해서 이야기해 줄 것이 있나요 ?

-> „ Also ich bin mit 18 Jahren aus dem Osten geflüchtet. Dort,  wo ich Grenzsoldat war, mussten immer zwei Männer für eine Woche die Grenze bewachen. Die Männer waren immer nur eine Woche zusammen, dass sich keine Freundschaft entwickeln konnte. In der einen Woche,  wo ich mit einem netten Mann zusammen an der Grenze stand, haben wir uns ziemlich gut verstanden. Da wir beide vom Osten weg wollten,  hatten wir eine Flucht geplant, aber dass war ziemlich schwierig, weil wir erst wieder nach Monaten zusammenkamen. Ich dachte schon,  dass wir nie wieder zusammenkamen, aber kamen wir. Als wir dann endlich flüchten wollten, war dies wiederum sehr schwer, da wir Hundesperren und Minengürtel überwinden mussten. Als wir dann im Osten waren sind wir erstmal 1 Stunde dort rumgelaufen,  bis wir schließlich mitten in der Nacht eine Kneipe gefunden haben. Da die Leute dort drinnen erkannt haben, dass wir Grenzsoldaten aus dem Osten sind, kam der Bundesgrenzschutz und hat uns erstmal nach München zur Nato geschickt. Nach 6 Wochen mussten wir nach Gießen oder wenn wir uns nachweisen konnten,  durften wir dort leben. Ich konnte mich nachweisen und habe dort dann eine kleine Wohnung bekommen.“ 18살 때 동독을 탈출했습니다. 국경수비대원 시절 2명이 일조가 되어 일주일 간 국경수비를 했습니다. 일조 2명은 일주일만 함께 근무하도록 해 우정이 싹트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한 주간은 좋은 대원을 만나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나처럼 동독 탈출을 원해서 탈출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와 다시 만나기까지 수개월이 지났기 때문이었죠. 처음에는 그와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짝이 된 것입니다. 마침내 탈출의 기회가 온 것이죠. 하지만 경비견을 따돌리고 지뢰밭을 피해야 했습니다. 1시간 가량 달리다 보니 한 밤중에 작은 술집이 있더구뇨. 손님들이 동독 국경수비대인 것을 알아차리고 서독연방국경대원이 와 저희들을 뮌헨에 있는 나토사령부로 보냈습니다. 6주 후에 기센으로 이동하든지 신분이 확인되면 뮌헨에 머물수 있었죠. 저는 신분이 확인되어 작은 집을 받아 지낼 수 있었습니다. 


Q) Warum sind Sie denn überhaupt geflüchtet? 왜 탈출한거죠 ?

-> „ Ich und mein Freund wollten ein anderes Leben, auch mal reisen, ein Auto besitzen und auch einen Fernseher, einfach frei sein!“ 저와 친구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죠. 여행도 해보고, 자동차도 갖고 TV도 갖고 싶었습니다. 그저 자유를 원했죠.

Q) Wie lange haben Sie dann noch dort im Westen gelebt, bis die Mauer fiel? 베를린 장벽이 해체될 때까지 얼마간 서독에서 살았습니까 ?

-> „Ca. 10 Jahre“ 약 10년입니다.

Wo haben sie dann im Westen gelebt?  서독 어느 지역에서 살았죠 ?

-> „In Gelsenkirchen (BRD)“  겔젠키르헨에서 살았습니다.

Q) Waren sie denn auch traurig, weil Sie von ihrer Familie und Freunden getrennt waren?  서독에 사는 동안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져 슬펐나요 ?

-> „Ja, ich dachte am Anfang,  dass ich sie nie wieder sehen werde.“  처음에는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Wie haben sie dann durch den Mauerfall erfahren?  어떻게 장벽이 해체된 사실을 알았나요 ?

-> „Durch das Fernsehen.“  TV를 보고 알았습니다.

Q) Wie lange hat es dann gedauert, bis Sie in den anderen Teil Deutschlands gekommen sind?  다시 동독 땅을 밟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

-> „Ich bin sofort zu meiner Familie gefahren“  즉시 가족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학생, 청소년들이 국경수비대원의 탈출 스토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과거 동독의 삶과 현실을 접하게 된것이다.


라. 대학교수 지원 및 도서관 건립 프로그램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완성됨에 따라 동독 내 대학에도 변화의 바람이 몰아닥쳤다. 무엇보다 마르크스 엥겔스에 기초한 정신과학, 사회과학에 대한 일대 개혁이 일어났다. 관련 과목이 폐쇄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학과로 대체되었다. 교사와 교수들도 대학을 떠났다.

아데나워 재단은 교사 교수 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해 한 학교에 적어도 한 명의 교수가 충원될 수 있도록 했다. 새 체제에 걸맞는 행정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국가학 등을 가르칠 교원을 찾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서독의 저명한 학자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동독의 여러 대학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아데나워 재단은 이와 함께 도서관 건립 프로그램도 추진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배우고 싶은 동독인은 비록 정치인들에 국한하지 않았다. 일반 주민에 대한 교육이 동반하지 않고서는 건전한 시민사회가 조성될 수도 없다. 아데나워 재단이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해도 수요에 부응하지 못했다.

홍보와 교육 자료들이 출판 분배되었고 수십종의 소책자들이 주제별로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데나워 재단은 새 체제와 관련된 다양한 도서를 갖춘 도서관 건립 프로그램을 추진해왔다. 세미나, 토론회 및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동독 곳곳에 도서관이 들어서 동독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했다.


2. 통일 22주년(2012) 프로그램


2012년 독일은 통일 22주년을 맞이했다. 동독 혼란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확립과 발전을 위한 아데나워 재단의 역할은 다양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통일독일에 또 하나의 특별한 과제가 부여되고 있다.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소위 ‘동독 향수(Ostalgie)’라는 특수한 현상이 부각되고 있다. 상존하고 있는 동서 간의 경제적 격차, 저 임금, 부족한 생활 인프라 등으로 인한 불만이 과거 동독에 대한 향수로 모아지고 있다. 동독 5개주를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좌파당(Die Linke)은 이러한 동독 향수의 결과이다.

이런 현상은 유럽연합(EU)를 이끌고 있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각종 동독 재건 프로그램을 통해 동서 간의 격차를 지속적으로 감소시켜 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 이를 차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 아데나워 재단은 다음과 같은 현상에 적극 대응해 ‘동독 향수’ 현상의 피해를 막고 있다.

첫째, 동독 신비주의이다.

서독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일상생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2000년대 중반부터 기이한 현상이 일고 있다. 과거 동독 사회와 사통당 일당 독재시대를 미화하는 일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공산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과 아직 어린 학생 및 청소년들 사이를 파고 들어 동독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데나워 재단은 주로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각종 세미나, 전시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과거 동독 사회의 실체를 사실대로 알리고 있다. 분단 시절의 사진 및 영상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1989년 여름 시작된 동독 탈출에서 월요데모의 시위현장을 녹화한 자료들을 활용해 구 동독체제를 미화하려는 작업을 차단하고 있다. 강의 시리즈나 홍보 출판에는 “Wie war das Leben in der DDR?"(동독 생활은 어떠했을까?)이 빠지지 않았다. 또한 동독 공산독재를 경험한 산 증인들과의 대화 프로그램도 학생, 청소년들이 동독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효과가 크다. 재단이 운영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Mytos und Wirklichkeit 신비와 현실’1)에는 구 동독 독재사회, 사통당 일당독재의 실체, 동독 급변사태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와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둘째, 극단적 포퓰리즘이다.

통일 직후 1991년 9월 동독 작센 주 호이어스베르더(Hoyerswerda)에는 수차례 외국인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극단주의자들이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 숙소를 공격해 아프리카, 베트남, 루마니아, 이란 출신자 등을 위협하고 폭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통일 후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발생했던 대량실업에 대한 두려움이 발단이었다.

동독 북부에 위치한 로슈톡(Rostock)에서도 외국인 기숙사 방화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경찰의 소극적인 대응과 주민들의 무언의 응원으로 충격을 주었다. 과거 히틀러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는 비판도 거셌다. 이후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네오나치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데어 슈피겔(Der Spiegel)은 1991년 제40호에서 외국인 테러사건을 표지기사로 다뤘다.2) 독일 사회는 한목소리로 네오나치의 재등장을 경고하고 확산을 막았다. 언론, 시민, 정당, 교육기관 등 모두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외쳤다.

통일 20돌을 맞은 독일에 좌파당(Die Linke)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극우파 민족민주당(NPD)이 고개를 들고 있는 현상에는 이런 극단적 포퓰리즘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좌파당에 이어 민족민주당이 세를 불려가고 있다. 민족민주당은 현재 동독 2개주(Mecklenburg-Vorpommern, Sachsen)에서 지방의회에 진출해 있다. 좌파당은 과거 동독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복지 확대를 내걸고 있고 민족민주당은 실업 문제를 이슈로 삼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배척하고 있다.

아데나워 재단은 다양한 행사를 기획해 이에 대응하고 있다. 나치 시대의 불행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사회적 현안들도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음을 교육하고 있다. 또한 통일의 당위성, 통일독일의 정치적, 경제적 힘, 슈타지의 과거행적들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지속하고 있다. 2009년 한해 동안 아데나워 재단이 개최한 행사만 400회였고 65회는 숙박을 포함한 2-3일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동서 간의 격차를 줄이고 동질성을 확대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 독일이 지향하는 민주주의 기본질서와 발전, 독일이 사회적 시장경제 및 유럽연합 틀 속에서의 독일사회는 아데나워 재단의 핵심적인 아이템이다.

IUED



1) www.DDRmytos.de.

2) “Lieber Sterben als nach Sachsen""작센 주로 가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라는 외국인의 푸념을 기사 첫머리에 올린 데어 슈피겔은 커버스토리(Hass gegen Fremed 외국인 증오)로 동독 사회에 만연한 외국인 증오문제를 심층 보도했다. Der Spiegel (Heft 40,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