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이해 오해

급변기 동독의 정치사회 상황

박상봉 박사 2012. 12. 13. 11:35

급변기 동독의 정치사회 상황

 

 동독의 정치적 상황은 1980년대 중반 급변하게 된다. 고르바초프 집권 후 동독은 물론 모든 동유럽 국가에 강력한 변화의 바람이 불게된 것이다. 동유럽 국가와 달리 분단국 동독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강력한 서독의 보이지 않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1) 서독의 풍요로운 체제를 동경하는 동독인들이 그들의 의지를 행동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탈동독 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1948년 분단된 이래 동독을 탈출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지만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탈북러시는 조직적이었고 단호했다. 동베를린 주재 서독대표부로 주민들이 몰려들었고2) 폴란드, 체코 등 주변국들은 서독 탈출의 경유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헝가리를 경유한 동독 청년들의 탈출은 베를린 장벽의 해체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헝가리가 동독 탈출의 주요 루트로 알려지자 동독인들의 탈출 러시는 더욱 강해졌다. 동독 내에서는 전통 야당 도시 라이프치히(Leipzig) 니콜라이(Nikolai) 교회를 중심으로 반공산 시위가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월요일 마다 시민들이 모여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게 되었다. 소위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다. 월요데모는 라이프치히를 넘어 주변 도시로 확대되었고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자의 수도 기아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월요데모는 많은 시민들의 주권 의식을 새롭게 했다. 여러 시민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공산세력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거듭났다. 동독 공산당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위성정당과 단체들도 새 시대에 걸맞는 정당과 단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해외로부터 체제전환 물결이 몰아치고 내부적으로 탈동독 러시가 일어나는 가운데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장벽 해체라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동독인들이 밤새도록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다. 서베를린 시내는 축제의 장이 되었고 동서독주민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했다. 중심가 쿠담 사거리는 밤새 동서독 주민들이 어울려 기쁨을 나누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콜 총리를 비롯한 서독 정치인들이 통일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되었고 콜 총리는 동독에 문제해결 10항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10개항 프로그램은 동독 정권을 변화로 몰아갔고 동독 공산당의 해체를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정당, 시민단체들이 만들어지고 민주적 정당으로 발전해 갔다.

  

1. 동구권 정치 상황

 소련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근간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방 개혁을 천명하게 되었다.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생겨나고 자유선거가 실시되며 체제전환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동구권의 개혁 개방의 흐름은 미소 양국의 군축과 평화 회담을 통해 더욱 거세게 흘렀다. 1989년 12월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몰타에서 만나 장거리 핵무기의 50% 감축에 합의하면서 냉전종식을 공식 확인하고 동서화해시대를 열었다.(몰타회담)

미소 간 탈냉전의 바탕 위에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도 가속화 되었다. 폴란드에는 솔리다르노스크라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노조 연대가 변화를 주도했다. 1980년 단찌히(Danzig) 레닌 조선소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이 발판이 된 솔리다르노스크는 80년대 후반 공식적으로 폴란드 공산정권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국정 운영에 동참하며 바웬사(Lech Walesa)는 1990년 자유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체코는 학생과 예술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반체제 작가 하펠(Havel)의 주도 하에 개혁 개방이 이루어졌다. 공산정권에 저항해 헌장 77(Charta 77)3)의 핵심 인물로 반사회주의 혁명(Samatenen Revolution)을 이끌었다. 이 공로로 하펠은 1989년 체코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런 동유럽의 변화는 미국과 서독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특히 헝가리는 1989년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는 결정을 내려 독일 통일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2. 탈동독 행렬

1989년 여름 조직적인 탈동독 행렬이 만들어졌다. 탈출 러시는 1989년 8월 8일 동독 주민 131명이 동베를린 주재 서독대표부로 탈출하며 본격화되었다.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주재 서독 대사관이 탈출 통로로 이용되었다. 외교공관에 들어간 동독주민들은 정치적 자유를 외치고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을 동독 정부가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헝가리를 경유한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은 베를린 장벽 해체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989년 8월 범유럽 유니온이란 단체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평화 축제 행사를 개최했다. 동독을 포함해 동유럽 국가들의 평화단체들이 참여했다. 행사가 끝난 후 동독 참가자 600여명이 모두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독 정부는 즉시 특사를 보내 탈출자 전원을 서독으로 데려왔을 뿐 아니라 헝가리 정부에게 지속적으로 국경을 개방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헝가리 정부는 강력한 서독의 외교적 요구와 경제적 지원을 수용하고 동독의 요구를 묵살, 對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 헝가리 외무장관 기율라 호른(Gyula Horn)은 1989년 9월의 국경개방 결정에 대해 “내 생애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4)

이것은 동독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위반하는 것이었고 관련 조약을 깨는 것이었다. 당시 헝가리 주재 동독 대사 게르트 페레스(Gerd Vehres)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호른 장관에게 “이 사안은 헝가리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독 주민의 문제로 헝가리 정부가 이렇듯 미적 미적 대응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으며 동독인들을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에 대해 호른 외무장관은 “이들을 강제로 동독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으며 유일한 해결책은 이들을 서방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라고 응답했다.5)

헝가리 정부의 대 오스트리아 국경개방은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으며 이 조치가 내려진 후 2달이 채 안된 10월 말까지 2만4천여 명의 동독인들이 이 루트를 이용해 오스트리아로 탈출했다.6)

이 사건을 접한 서독 정부의 발 빠른 대응도 놀라웠다.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동독주민들을 위해 모든 가능한 대책을 수립했다. 특사를 파견하고 특별열차를 보내 모든 탈출자들을 안전하게 서독 바이에른으로 이주시켰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충격을 불러왔고 동독에도 엄청난 파장을 주었다. 월요데모 참가자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탈동독 행렬도 거세져 갔다. 마침내 동독 공산정권은 1989년 11월 9일을 기해 베를린 장벽을 해체할 것을 결의하고 주민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3. 월요데모와 호네커 축출

 

가.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

월요데모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Nikolai)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모임으로부터 발전된 시위운동이었다. 당시 평화기도는 동독 기독교 저항문화의 표현이었고 비폭력을 그 수단으로 했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도 가담했던 평화기도운동은 1981년부터 시작됐고 1985년 활성화될 때까지 한 조그만 교회의 기도운동에 불과했다. 이 조그만 평화기도가 동독 공산당에 대한 저항운동의 산실이 된 것은 1988년 기도모임 후 벌인 시위 때문이다. 이때부터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는 늘 시위행진의 출발점이 되었고 공안당국의 관찰대상이었다. 89년 5월에는 공안경찰이 교회를 포위해 시위를 막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기도모임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라이프치히의 다른 교회로 확산되어갔고 경찰병력도 이에 비례해 증가되어 갔다. 악화일로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89년 9월 4일에는 평화기도가 끝난 후 최초로 동독 공산당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약 1천명의 시위대원들은 “슈타지 사라져라” “여행의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다면 대량탈출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슈타지의 무력진압으로 70명의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다. 그 이후 매주 월요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동독을 새로운 사회로 변화시킨 ‘월요데모’가 시작된 것이다.

89년 10월 9일 월요데모에는 무려 7만명이 가담했고 최초로 동독 공안당국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시위대들은 늘 ‘비폭력’을 연호했고 무력으로 시위를 중단시키려 했던 공안당국의 노력은 허사였다. 사통당(SED)은 공식적으로 동독교회에 정치적 행동을 삼가고 기도운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라이프치히와 함께 베를린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반공시위가 진행됐다. 89년 10월 2일에는 나치시대 저항의 대명사이자 개신교 지도자들의 민주화 운동의 산실인 동베를린 겟세마네 교회에서 정치범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고 교회 앞에서는 경고시위가 시작됐다.

호네커(Erich Honecker) 총서기는 월요데모를 당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하고 무력탄압을 명령했으나 당시 상황을 직시한 당은 호네커를 축출하고 에곤 크렌츠(Egon Krenz)를 총서기로 선출해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셌다. 이미 호네커의 후임으로 내정되었던 크렌츠는 개혁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에곤 크렌츠는 개혁공산주의자이자 주민들의 대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공산당 작센 지부장이었던 한스 모르로브(Hans Modrow)를 내각의 총리로 선출했다.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해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반세기 억눌렸던 민심을 추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독인들의 요구도 다양해져 갔다.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에 이어 민주화 요구도 거세게 이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에 대한 요구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나. 호네커(Erich Honecker) 축출

 

동독 사회는 한편으로는 라이프치히, 베를린 및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전개되는 시민들의 저항운동과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탈출로 일대 혼란에 빠졌다. 월요데모는 회를 거듭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시위인원이 증가하였고 10월 16일에는 12만여 명이 시위에 가담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위구호도 초기의 “Wir sind das Volk 우리가 국민이다”에서 “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한 민족이다”로 바뀌었다. 동독 공산당의 독재에 반기를 들며 주권을 요구하던 주민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서독과의 통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나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은 동독을 탈출한 주민들을 수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사관 뜰에는 임시 천막이 쳐지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주민들을 보호했다. 상황이 이렇듯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호네커 서기장은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건국 행사에는 소련의 개혁 개방을 주도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참석했다.

하지만 고프바초프는 호네커와 회담을 갖고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동독 공산당 SED(사통당, 사회주의 통일당)이 현안을 시민들과 함께 해결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또한 40주년 기념 연설에서 “Wer zu spae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인생이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하게 될것이다”7)라며 개혁의 시기를 놓치지 말 것을 설득했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호네커는 기념 연설을 통해 과거 40년 동안 동독이 이룩한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당시 일어나고 있던 동독인의 탈출과 반공 시위는 서독 정부의 흑색선전에 기인하고 있다고 강조했다.8)

재야 시민단체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89년 10월 16일에는 전 동독지역에서 약 12만 명이 참가했던 월요데모가 일어났고 그 규모에 눌린 공안경찰은 계획했던 대규모 진압작전을 수행할 용기를 잃고 말았다. 동독 공산당 SED는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1989년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는 사통당 서기장은 물론이고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사퇴하였다. 또한 사통당 정치국은 1989년 11월 8일 자로 폐쇄되었다.


4. 동독 자유선거

 

89년 가을 절정을 이룬 동독주민들의 반공산당 투쟁은 두 가지 결실을 이뤘다. 하나는 동서를 물리적으로 가로막았던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탁회의(Runder Tisch)’라고 하는 시민운동 연합체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가. 원탁회의(Runder Tisch)

 

원탁회의는 호네커의 실권 후 총서기에 오른 크렌츠 집권 시절인 89년 12월 7일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원탁회의의 주요 구성원은 정치적 변혁기에 동독의 민주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재야시민단체와 교회대표들이었다. 이들은 전환기 동독의 실질적인 주도세력으로 당시 혼란기의 동독의 주요 정책대안을 제시하며 국가를 이끌었다. 이렇듯 국민과 시민단체의 뜻이 원탁회의로 모아지자 모드로브 총리는 기존의 집권자(호네커나 크렌츠)들이 대화를 거부했던 원탁회의 지도자들과의 공식대화를 요청했을 뿐 아니라 1990년 1월 28일에는 정부도 원탁회의에 공식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이후 국가 통치가 원탁회의와 모드로브 정부의 이원체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원탁회의는 우선 공산당 SED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다양한 정치활동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당의 ‘창과 방패’로 공산권력의 시녀였던 국가안전부 슈타지(Stasi)의 해체를 공론화했으며 헌법 개정과 조속한 시일 내에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동독국민들의 뜻을 존중해 서독의 콜 총리도 ‘10개항 프로그램’9)을 제시해 모드로브 정부를 압박했다. 단계별 통일을 주장하며 우선 동서독 간 조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10)를 만들자는 동독의 모드로브의 제안은 묵살되고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나. 독일연합(Allianz fuer Deutschland)의 압승

 

동독 유권자 총 1,220만이 참가하게 될 최초의 자유선거에는 변화를 주도했던 시민단체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혼란기에 생겨난 20개 정당과 여러 정치적 그룹들이 참여해 주민들의 심판을 기다렸다. 동독 기민련 CDU, 독사련 DSU(서독 기사련과 유사), 민주봉기 Demokratischer Aufbruch 등 3개 정당이 연합한 독일연합 Allianz fuer Deutschland의 압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동독 사민당(SPD)과 공산당 SED의 후신인 민사당 PDS도 출사표를 던졌다. 서독 녹색당(Gruene)의 지원을 받던 동맹90 Buendnis90, 자유민주연대 BFD(Bund Freier Demokraten)과 여러 군소 정당들도 참여했다.

동맹 90에는 뉴포럼 Neues Forum, 이니셔티브 평화와 인권 IFM(Intiative Frieden und Menschenrechte) 및 민주주의 지금 Demokratie Jetzt 등이 연합했다. 또한 자유민주연대는 동독 위성정당 LDPD, 독일포럼정당 DFP 등이 연합한 서독의 자민련 FDP와 유사한 정당이다.

이 선거의 최대 쟁점은 미래에 있을 통일에 관한 사안으로 어떠한 형태의 통일을 추진하며 어떤 속도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동독 기민련 CDU은 서독 기본법 23조11)에 따라 동서독 통일을 추진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기본법 23조는 동독이 서독 연방에 편입함에 따라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Nie wieder Sozialismus 사회주의와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동독 사민당 SPD는 기본법 146조에 따라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동서독 통일을 완성한다는 입장이었다. 사민당의 선거 구호는 ‘미래의 새 이름 사민당’이었다.12)

이에 비해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은 동독과 서독이 일대일 국가 간 연합체를 맺자고 주장했고 서독의 녹색당의 지원을 받던 동맹 ‘90은 단계적 통일론을 주장했다.

선거결과 동독 주민들은 독일연합에 48%, 사민당에 21.9%, 민사당에 16.4% 그리고 동맹 90 Buendnis 90에는 불과 2.9%의 표를 선사해 서독연방에의 편입을 통한 통일과 사회주의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며 통일의 불을 지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총선에 출마한 독일연합의 선거 포스터에서 기민련이 중심이 된 독일연합은 통일부정론자들에게 기회를 주지말자는 구호와 함께 ‘사회주의여 안녕 Nie wieder Sozialismus’을 전면에 내세워 압승을 거뒀다.


<표 1> 정당별 득표 결과

정 당

득 표 율

 의 석 수

CDU

40.8

163

SPD

21.9

88

PDS

16.4

66

DSU

6.3

25

BFD

5.3

21

Buendnis 90

2.9

12

DBD

2.2

9

Gruene/UFV

2.0

8

DA

0.9

4

NDPD

0.4

2

DFD

0.3

1

AVL

0.2

1

기타

 0.4

0

     출처: 독일 내무부


다. 민주 내각 구성

 

선거결과 주도권을 장악한 독일연합의 기민련 CDU(득표율 40.8%)은 로타 드메지어(Lothar de Maiziere)를 중심으로 사민당 SPD(득표율 21.9%)과 자유민주연대 BFD(득표율 5.3%) 등을 묶어 대연정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동독 의회는 기민련의 총재였던 드메지어를 찬성 265표 반대 108표로 총리로 선출했다. 부총리 겸 대변인에는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13)이 임명되었다.

새로 구성된 내각과 의회는 서독과의 통일을 전제로 중요한 현안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1990년 6월 17일 서독과의 화폐, 경제, 사회통합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21일에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의 해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표에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14)를 임명했다. 그리고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은 1990년 10월 3일자로 서독 연방에 편입할 것을 결의하고 6개월의 임무를 마감했다.

1990년 10월 2일 통일 전야제에서 드메지어 총리는 “이별은 슬픔을 의미하지만 동독과의 이별은 기쁨이요 희망”이라는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임기를 끝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상임지휘자이자 월요데모의 주역이었던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했다.


5. 선거결과 분석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동독인의 통일열망이다. 동독인들이 서독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체제를 동경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서독 체제로의 편입을 통한 즉각적인 통일을 원했다는 점은 다소 의외였다. 동독 기민련(Ost-CDU)은 서독 기민련과 동일한 기조 하에서 서독 연방체제로의 편입이라는 서독 주도의 통일을 주장했던 반면 사민당 SPD는 일대일로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 따라 통일을 완성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동독 기민련과 독사련 등 독일연합이 과반수에 가까운 표를 획득했다. 결과적으로 동독 주민들은 통일에 소극적이었던 사민당에 등을 돌렸다. 

둘째, 강력한 리더십을 원했다. 통일에 대한 야당인 사민당(SPD)의 소극적인 입장과 달리 기민련(CDU)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통일을 강력히 밀어 부쳤다. 패전 후 연합국과 유럽 주변국들의 견제로 분단을 당연히 수용해야 했던 상황이었지만 콜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여러 기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독주민의 통일 인식은 분단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분단 직후 96%에 달했던 통일 염원은 1987년에는 80%로 줄었다. 또한 통일에 대한 현실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는 분단 초기 60%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했던 반면 80년대 후반에는 불과 3%로 감소했다.15) 이것은 당시 서독인들은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콜 총리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통일을 현실 가능한 일로 만들어 갔다. 전통 우방이었던 미국과 공조체제를 적극 활용했다. 동독 급변사태에 대해 일일이 조지 부시 대통령과 통화하며 긴밀히 협력해 나갔다. 부시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고르바초프를 설득했다. 수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회담을 갖고 반독일 정서를 잠재웠다. 소련의 경제개혁을 위해 대략 600억 달러를 지원할 것도 약속했다.

콜 총리의 강력한 외교력에 힘입어 독일은 주권을 되찾았다. 미국과 소련이 독일 문제에 대해 민족의 자율적인 결정을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이 결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영국의 대처 총리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도 콜 총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16) 하지만 무엇보다 콜 총리의 강력한 리더십과 외교적 역량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헝가리의 국경개방이었다. 또한 통일에 다소 불안감을 보였던 서독 국민들을 설득했으며 동독 주민들에게는 미래 통일된 독일의 모습을 제시했다.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미래를 약속했다.

IUED



1) 독일의 주요 언론은 고르바초프의 역할에 대해 “독일에는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준 반면 소련에 대해서는 장례를 선고(Sargschreiner der UdSSR)했다”고 전한다. Sueddeutsche Zeitung (2001.8.17).

2) 박상봉, 『독일통일 통일한국』 (서울: 진리와자유, 1999), p. 77 이하.

3) Charta 77은 1977년 시작, 지식인, 예술인, 노동자는 물론 공산정권 하에서 비밀경찰에 소속되었던 구 공산당원들도 동참했던 시민운동이자 공산당에 의해 자행되었던 인권침해에 저항했던 시민운동이었다.

4) Der Spiegel , Nr. 36 (2 September 1991).

5) 위의 글, p. 115.

6) 호른 외무장관은 대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한 순간을 “Freiheit, die ich meine 내가 생각하는 자유"라는 제목 하에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7) Dokument: Michail Gorbatschow zum 40. Jahrestag der DDR am 6. Oktober 1989.

8) 박상봉,『독일통일 통일한국』(서울: 진리와 자유 1999), p. 81.

9) 콜 총리 10개항 프로그램의 특징은 양독 관계 뿐 아니라 유럽의 틀 속에서 동서독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부 5개항은 동서독 관계와 통일문제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후반부 5개항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기본틀 속에서 독일문제를 다룬다는 내용이다.

10) 모드로브 총리는 통일을 전제로 서독과 동독이 조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를 이루자며 동독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콜 총리는 모드로브의 제안을 거절하고 ‘10개항프로그램’을 제시했다.

11) 기본법 23조는 다음과 같다. “Dieses Grundgesetz gilt zunächst im Gebiete der Länder Baden, Bayern, Bremen, Groß-Berlin, Hamburg, Hessen, Niedersachsen, Nordrhein-Westfalen, Rheinland-Pfalz, Schleswig-Holstein, Württemberg-Baden und Württemberg-Hohenzollern. In anderen Teilen Deutschlands ist es nach deren Beitritt in Kraft zu setzen.“ ”기본법의 효력의 범위는 우선 바덴, 바이에른, 브레멘, 베를린, 함부르크, 헤센, 니더작센, 노드라인-베스트팔렌, 라인란드-팔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뷔르템베르그-바덴, 뷔르템베르그-호엔쫄른 주이며 독일에 속한 다른 부분(동독)은 기본법 유효범위에 편입됨에 따라 확장된다.“ 동독 인민의회는 1990년 8월 동독은 기본법 23조에 따라 서독 연방에 편입할 것을 결의했다.

12) 서독의 기본법은 통일과 관련해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기본법 23조는 연방의 확대조항으로 동독의 경우 서독연방에 편입됨으로써 통일이 완성된다는 규정이며 146조는 통일헌법을 제정해 법적인 틀을 만들어 통일을 추진하자는 내용이었다.

13) 메르켈은 통일 후 2000년 4월 10일 기민련 CDU의 총재가 되었고 2005년 11월 22일에 연방총리로 선출되었다. 메르켈 총리는 2009년 재선에 성공해 7년째 연방총리로 재임 중이다.

14) 1940년 동독 로슈톡(Rostock)에서 태어난 가우크 목사는 통일 후 슈타지 문서관리청(일명 가우크 청)의 청장을 역임헸으며 2012년 3월 10일부터 독일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15) Bundeszentrale fuer politische Bildung, "Die Teilung Deutschlands 1955 bis zur Einheit", Informationen zur politischen Bildung 233, (4. Quartal 1991), p. 28.

16) 독일 통일에 대해 영국의 반발은 거셌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독일민족의 자율적인 결정에 동의한다고 하자 대처 총리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강력히 반대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오히려 동독 사통당이 승리하기를 내심 바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