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이해 오해

콜 총리의 통일 리더십

박상봉 박사 2014. 1. 10. 17:20

콜 총리의 통일 리더십

 

동독인의 집단탈출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독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탈출을 통일로 이끈 헬무트 콜 총리의 리더십이다. 콜의 통일 리더십은 확고한 통일철학에 기초하였다. 분단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지녀야할 최고의 가치는 분단을 극복하는 일, 즉 통일이다. 통일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제기될 수 있으나 최고 권력자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통일이어야 한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콜 정부가 추진했던 3가지 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독 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공산정권과의 통일협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파악했던 콜 정권은 대량탈출을 민주정권을 창출하는 기회로 삼았다. 대내적으로 월요데모를 통한 민주화 시위와 대외적으로는 조직적 탈동독으로 궁지에 동독 공산당을 압박해 자유선거를 치르도록 했다.(콜 총리 10개항 프로그램) 선거일은 1990년 3월 18일이었다. 선거결과 동독 기민당 등 반공산 정당들이 압도적으로 승리해 반공 변호사였던 로타 드메지어(Lothar de Maizier)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콜 총리는 드메지어 총리와 통일협상을 추진했다. 협상과정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동독 공산지도부가 집단적으로 통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독 공산당으로 하여금 호네커 총서기를 축출하도록 유도한 것이나 동독 지도부에 대한 책임소재를 동독법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결정은 이런 고심의 결과이었다. 이에 따라 통일 후 법적 책임을 져야 했던 동독 지도부는 호네커 총서기와 슈타지 총책이었던 밀케와 방아쇠를 당긴 국경수비대원에 국한했다. 혐의는 동독 탈출자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고 실제 발포한 것이었다.

 

둘째, 대소외교에 최선을 다했다.

동독의 사태를 추적하며 통일의 자신감을 얻은 콜 총리는 대소외교에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도 독미공조를 바탕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콜 총리는 물론 겐셔 외무장관은 수시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과 독일 문제를 협의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가운데 콜 총리는 90년 7월 16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코카서스 정상회담에서 통일을 향한 가장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코카서스 지방 쉐제스노보드스크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는 겐셔(Genscher) 외무장관과 바이겔(Waigel) 재무장관이 동참했다. 소련의 개혁정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통일 이후 소련군 철수 및 연방군의 국방문제에 관한 8개항에 대해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요 합의사항은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시한을 4년 내로 명시함으로써 소련군 철수의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한 것이고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4개 연합국의 지위를 상실함과 동시에 독일은 완전 주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군 철수와 관련해서는 서독은 모든 철수비용 일체를 지불함과 동시에 철수하는 소련군을 위한 소련 내 주둔시설을 마련해주기로 하는 등 합의에 대한 서독정부의 대(對) 소련 재정지원이 약속되었다. 또한 합의사항에는 통일된 이후 독일의 병력 규모를 37만 명으로 제한한다는 내용과 통일 연방군은 대량살상무기인 ABC 무기 즉 핵, 화학, 생물무기의 제조는 물론이고 보유 처리 등 일체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로 인해 독일은 통일 후 주변국에 대한 위협을 배제하고 평화에 기여하는 조치를 제도적으로 갖추며 통일로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음은 8개항의 합의사항이었다.

물론 영국의 대처 총리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독소 합의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독일의 주권회복과 통일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고 소련이 동의한 합의사항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셋째, 탈출자에 대한 전원 수용 방침이었다.

이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시점까지 350만명의 동독인을 수용한 서독정부는 1989년 동독 급변사태를 촉발시킨 동독 탈출자들도 예외없이 수용한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동베를린 서독대표부, 프라하나 바르샤바 서독 대사관에 진입한 동독 탈출자들을 전원 서독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콜 총리는 헝가리를 경유해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600여명의 청년들을 서독으로 이주시킨 것은 물론 헝가리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토록 했다. 이 루트를 통해 불과 한달여 만에 2만4천여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런 정책들은 통일을 절대가치로 이해하고 확고한 통일철학을 지니지 못했다면 추진할 수 없었던 일이다.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