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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70: 베를린 장벽붕괴 18주년

박상봉 박사 2007. 11. 14. 22:23
 

해설70: 베를린 장벽붕괴 18주년


냉전 시대 베를린은 분단의 상징으로 전 세계 스파이들의 활동무대였고 냉전이 끝난 21세기 베를린은 유럽의 심장부로 동서 교류의 주요 심장부가 되고 있다. 베를린에서 시작된 Autobahn(고속도로)는 위로는 모스크바를 거쳐 성 페테르부르그에 까지 이르며 아래로는 파리, 로마,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까지 이른다.


분단 시대 베를린은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섞인 도시였다. 155 km에 달하는 장벽이 베를린 전체를 동서로 가르고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던 수 천 명의 동독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서독사회는 베를린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동독 한 가운데 섬처럼 외롭게 놓여있던 도시였지만 200만 시민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서독의 도시들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구간을 오가며 베를린 시민들은 동독주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미, 영, 프랑스 연합국과 소련은 베를린을 분할 점령했다. 소련이 동독을 점령했고 서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1948년에는 소련군과 동독이 소위 베를린 봉쇄를 단행해 베를린 주민들에게 전기를 비롯해 생필품 공급을 중단했다. 이를 통해 서베를린 주민들을 모두 서독으로 이주시켜 결국 베를린 전체를 동독이 점령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공중다리(Air Bridge) 작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연합국이었던 미영불 세 나라가 수백대의 수송기를 동원해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그 와중에 베를린 자유대를 세우고 발전소도 세웠다. 결국 소련과 동독정부는 베를린 봉쇄조치를 스스로 풀어야만 했다. 더욱이 그 이후 서베를린은 동독 탈출의 종착지가 되었고 급기야 동독은 1961년 베를린장벽을 설치해야 했다. 동독을 떠나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서베를린을 둘러 설치된 3.6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은 동서를 물리적으로 완전히 갈라 놓았다. 서베를린으로의 탈출은 목숨을 건 투쟁이 되었다. 장벽을 넘다 총에 맞은 청년들이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가야 했고 장벽 주변에 설치된 동독 국경경비대의 초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런 베를린 장벽이 어제 11월 9일로 붕괴 18주년을 맞았다. 1980년대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에 힘입어 동유럽이 체제전환을 가속화하고 동독인들의 탈출도 조직화되었다. 떼를 지어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진입해 들어갔고 동베를린에 위치했던 서독 대표부에도 동독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독 정부는 서독 행을 원하는 모든 동독인들을 예외없이 철저히 보호해 서독으로 이주시켰다. 지난 1989년 가을 수 십 만명의 동독인들이 이렇게 서독 땅을 밟았다. 동독은 서독 콜 총리에게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콜 총리는 오히려 동독에 자유선거를 실시해 정통성을 갖춘 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공산정권은 호네커를 축출하고 개혁 공산주의자를 전면에 내세워 주민들의 탈출을 중단시키려 했으나 동독 탈출자들의 행렬은 더 거세져 갔다. 동독 정권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다. 하나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및 탈출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독인들에게 자유로운 서독 방문을 허가하는 것이었다.


이미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주변 공산동맹국가들이 개혁과 개방을 받아들였고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마저도 변화를 추구하는 상황 속에서 동독정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28년의 세월동안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이 결정이 내려진 첫날 서베를린 시내는 밤새도록 동독인들이 몰려들어 축제의 장이었다. 시중은행에서는 동독인들에게 현금 100 마르크씩을 환영금으로 나누어주었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 아직 남아있던 장벽을 망치와 도끼로 부수는 등 분단의 설움을 한껏 달랬다.


이렇듯 11월 9일은 동독인에게는 해방의 날이자 통일이라는 제2건국의 토대를 닦은 날이다. 분단을 만든 역사가 우리에게도 독일의 11월 9일과 같은 해방과 제2건국의 날을 허락해 줄 것을 기대해본다.

IUED


본 해설은 매주 토요일 8시 50분 극동방송 ‘통일을 향하여’에서 통일컬럼으로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