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나리오

독일통일의 교훈(2): 탈출자대책

박상봉 박사 2007. 1. 30. 15:43
 

독일통일의 교훈(2) : 탈출자 대책


동독인의 대량탈출은 유럽 및 국제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던 독일통일 반대여론에 쐐기를 박았다. 탈출자들은 기정사실화 되어있던 동서독 사이의 평화공존은 일종의 허구였음 강력히 외쳤다. 모범적인 평화정착이라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동독 공산정권의 탄압 속에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치범들은 감옥에 갇히기 일쑤였다. 많은 반정부 인사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서독으로 이주했고 젊은 청년들은 목숨을 걸고 베를린장벽을 넘었다.

총상을 입고 방치된 채 숨을 거둔 청년들이 생겨났고 베를린 장벽 서베를린 측에는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평화정착의 이면에 감춰졌던 비극들이 모아져 또 다른 탈출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1989년 베를린장벽을 해체시켰다. 끊임없이 자유을 찾는 탈출의 발길이 분단을 끝냈고 모두가 반대했던 통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동독인의 탈출


동독인의 탈출은 분단 직후부터 이어졌다. 1949년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베를린과 동독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주민들은 보이지 않는 이주를 시작했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이 세워질 때까지 약 3백만명이 탈출했으며 동독 내 비밀탄압도 가중되어 갔고 동독 경제는 더욱 열악해졌다. 이런 탈출자의 수가 1959년 동독 정부의 국경수비강화와 처벌이 강화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주춤해졌으나 60년부터는 또 다시 증가했다.


동독탈출자 현황 (1949 ~ 1961)

연도

탈출자(전체)

탈출자(베를린경유)

베를린장벽경유

정치범석방

1949

129,245

 

 

 

1950

197,788

193,277

 

 

1951

165,648

 

 

 

1952

182,393

118,300

 

 

1953

331,390

305,737

 

 

1954

184,194

104,399

 

 

1955

252,870

153,693

 

 

1956

279,189

156,377

 

 

1957

261,692

129,579

 

 

1958

204,092

119,552

 

 

1959

143,917

90,862

 

 

1960

199,188

152,291

 

 

1961

155,402

125,053

8,507

 

1962

21,356

 

5,761

 

1963

42,632

 

3,692

18,713

1964

41,876

 

3,155

1965

29,552

 

2,329

1966

24,131

 

1,736

1967

19,573

 

1,203

1968

16,036

 

1,135

1969

16,975

 

1,193

1970

17,519

 

901

1971

17,408

 

832

1972

17,164

 

1,245

1973

15,189

 

1,842

1974

13,252

 

969

1975

16,285

 

673

1976

15,168

 

610

1977

12,078

 

721

1978

12,117

 

461

                                                                                 (단위: 명)

1979

12,515

 

463

1,281

1980

12,763

 

424

1,012

1981

15,433

 

298

1,443

1982

13,208

 

283

1,530

1983

11,343

 

228

1,127

1984

40,974

 

192

2,341

1985

24,912

 

160

2,676

1986

26,178

 

210

1,536

1987

18,958

 

288

1,247

1988

39,832

 

590

1,094

1989

343,854

 

 

 

3,595,219

 

40,101

ca.34,000



도표설명

1. 1953년 탈출자가 급증한 것은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들의 봉기를 소련군과 동독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으로 인한 것임. 서베를린에는 이날을 기념해 17. Juni Strasse라는 거리이름을 두고 이 날을 기억 속에 남겨두었다.

2.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이후 탈출자는 급감하게 되었다.

3. 정치범은 1963년 내독성 차관 루드비히 레링거(Ludwig Rehlinger)의 동베를린 방문 후 제1호 석방이 있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해체될 때까지 약 3만4천명(Der Spiegel 자료)이 석방된 것으로 집계된다.

4. 베를린장벽을 통한 탈출은 장벽이 세워진 초기와는 달리 국경수비대의 강화와 탈출자에 대한 무자비한 사격명령으로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어려워졌다.

5. 1959년 탈출자가 감소한 것은 그해 국경통제가 강화되고 탈출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 것을 시사하고 있음.

6. 1989년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해인데 30만여명의 탈출자가 89년 여름 한꺼번에 동유럽 서독대사관이나 헝가리를 경유해 서방세계로 탈출했다. 특히 헝가리 정부의 대오스트리아 국경개방은 베를린장벽과 동독 몰락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건으로 기록된다. 헝가리 정부의 오스트리아 국경개방 결정이 내린 직후 1달만에 무려 2만4천여명의 동독인들이 이 루트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서독의 정책


서독의 탈출자 대책은 국가로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담고 있다. 탈출자의 직접 구출은 물론이고 제3국을 경유한 탈출자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서독으로 입국시키는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탈북자 대책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탈출자 전원수용


서독정부는 모든 탈출자들을 전원 수용했다. 독일은 패전 독일의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이 동베를린과 동독에는 소련이 서베를린과 서독에는 미,영,프 세 나라가 점령군으로 입성함으로 분단의 원인이 마련되었다.

서방 3개국의 자유 민주주의 구상과는 달리 소련은 1949년 동독에 공산정권을 수립토록 했고 이를 계기로 동독과 서독은 분단국이 되었다. 이후 동서독 주민들은 보이지 않는 체제경쟁 속에서 자유와 나은 삶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물론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독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통계에 따르면 1961년까지 3백만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한 반면,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경우는 약 40만명 정도였다. 동독인의 엑소더스는 동독 공산정권으로 하여금 베를린 장벽을 세우도록 했다. 이렇듯 서독정부는 서독행을 원하는 모든 탈출자들을 전원 수용하였다.


- 정치범석방


정치범 석방은 서독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탈출자들을 지원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나라 통일부에 해당했던 내독성(Ministerium fuer innerdeutsche Beziehungen)은 분단으로 인한 문제 해결의 주무부서였고 무엇보다도 탈출자와 정치범들의 석방에 최선을 다했다. 정치범 석방은 동독 내에서 벌어지는 광범위한 인권침해와 탄압을 우려하는 서독 사회를 대신해 서독 정부가 적극 나선 결과였다.

1963년 레링거 차관은 10만 마르크를 들고 동베를린을 찾았고 정치범 1호를 석방해 이주시킨 후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약 3만4천명의 정치범을 1인당 4만 DM에서 9만5천 DM을 지불하고 이주시켰다. 총 예산 34억 DM가 지출되었고 1인당 평균 9만 DM가 소요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호 석방 이후 정치범 석방은 서독 교회가 주관해서 추진했다.


- 탈출외교


탈출외교는 서독 정부가 탈출자들을 전원 수용한다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동독탈출자들을 수용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탈출외교의 절정은 1989년 헝가리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정책이다.

1989년 8월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범유럽 유니온이라는 민주단체의 평화축제 행사를 위해 국경을 3, 4 시간 개방할 것을 허락한다. 이 기간 동안 6백여명의 동독 참가자는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게 되었고 서독 정부는 이들을 모두 서독으로 이주시켰고 이를 계기로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차후 지속적으로 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해 줄 것을 정부 차원에서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서독의 외교정책에 맞서 동독 정부도 적극적인 헝가리 외교를 밀어부쳤다. 동독 호네커 정권은 사회주의 형제국 동맹국임을 내세워 서독의 요구를 묵살할 것을 요청했으나 헝가리 네메츠 총리와 기율라 호른 외상은 서독의 요청에 따라 대 서방 국경을 개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참고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


탈북자의 종착역은 통일


우리나라에 입국한 탈북자가 지난 1월 3일을 기해 1만명을 돌파했다. 이미 수차례 거론했듯이 탈북자는 무능한 김정일 체제가 지속하는 한 절대로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김정일 세습독재는 인민의 의식주보다 자신의 권력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민들이 북한에 머물러있는 한 배고픔, 공포,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탈북은 인민들에게 새로운 삶과 남한으로의 이주 가능성이 크다. 남한에 정착해있는 탈북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을 향한 러브콜은 이제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큰 흐름으로 북한 사회를 덮치고 있다. 결국 탈북자의 종착역은 통일이다. 이런 막을 수 없는 탈북의 물결을 단축하고 통일을 시대적 사명으로 확인할 때 통일한국은 보다 빨리 후유증과 문제점을 치유하고 재도약의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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