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나리오

남북통일의 비교우위(1)

박상봉 박사 2007. 1. 15. 11:42
 

남북통일의 비교우위(1)


남북한 통일은 우리에 앞서 통일을 이룩한 예멘, 베트남, 독일과는 다르다. 이들 통일국가들의 사례를 연구해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통일은 전례에 비해 절대적 우위에서 통일을 맞고 있는 셈이다.


분단국의 통일방안


우리에 앞서 통일국가가 된 베트남, 예멘, 독일의 통일은 방식과 절차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추진되었다.

베트남은 월맹에 의한 무력적화통일이다. 지난 1954년 7월 21일 이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월남) 이북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이 수립되었다. 월맹과 월남 사이의 전쟁은 1959년 발발했다. 미국은 친미 고딘디엠 정권이 붕괴되던 1963년 본격적으로 참전해 1973년 휴전회담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천억 달러의 전비를 부담했다. 휴전이 성사되자 미군은 월맹이 또 다시 침략해올 경우 즉시 참전한다는 약속과 함께 모든 첨단 무기를 남겨두고 철수했다.

그러나 월맹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유도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사명에 불탔다. 월남 곳곳에 공산 프락치들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호치민의 공산당에서 9,500명, 웬후토의 인민혁명당 4만명 등 인구의 0.5%에 해당하는 5만명에 달하는 간첩들이 시민단체 등 곳곳에서 암약하기 시작했다.

월맹의 끈질긴 침투와는 반대로 티우 대통령 등 고위급 지도자들의 부정 부패는 극에 달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경제적이나 군사적으로 월등했지만 갈등, 분열, 뇌물, 마약, 매춘, 도박 등으로 사회 내부는 급격히 썩어가고 있었다. 58만명에 달했던 정규군 중에는 10만명에 달하는 숫자가 위장휴가를 떠나고 티우 등 고위직 자녀들은 입대 후 외국유학을 떠나는 국가기강은 무너져 갔다. 드디어 1975년 3월 월맹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불과 한달여만인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고 말았다.

주요공직자, 지도층인사, 언론인, 정치인 등이 체포되어 ‘인간개조학습장’에 보내져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고 반체제인사, 종교인, 교수,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 외에도 수백만명이 무작정 탈출을 시도해 월남 보트 피플이 전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예멘은 합의통일로 시작해 무력으로 완수한 흡수통일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반도 남반에 위치한 예멘은 북측에는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남측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정착된 채 분단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북예멘이 상대적으로 부유하긴 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남북 예멘 모두 불안정한 요소를 안고 있었다. 무력충돌이 잦은 가운데 1989년 동서 화해의 흐름을 타고 정상회담을 개최해 이듬해 5월에 통일을 선포하고 한 나라가 되었다.

통일헌법에 따라 통일예멘은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하게 되었고 통일협상은 주로 통일 후 권력배분에 관한 것이었다. 대통령(살레)과 국방장관은 북예멘이 맡고 부통령(알비드), 총리, 외무장관은 남예멘이 맡는다는 합의였다. 하지만 합의 통일 후 양국 세력들의 권력다툼은 더욱 거세졌다. 이슬람율법에 대한 남북 갈등, 여성의 사회참여, 음주 허용여부, 일부다처제 등을 둘러싸고 건건이 충돌하게 되었고 남북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에 유리한 입장을 대변하며 사회는 급속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혼란 가운데 남예멘 지도자들이 집무를 거부하고 아덴(남예멘 수도)으로 철수하는 사태가 발발했다. 1994년 남북예멘 지도자들은 다시 권력배분 등 위기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서로 신뢰하지 못한 가운데 또 다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전쟁은 북예멘의 승리로 돌아가 재통합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독일은 합의통일로 동독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흡수통일이다.

1989년 대량탈출로 위기를 맞게된 동독은 헝가리의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개방으로 최대 위기를 맞는다. 호네커가 퇴출되고 동독 사회는 라이프치히 월요데모를 중심으로 자유와 통일을 원하는 구호로 넘쳤다. 개혁공산주의자였던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 총리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서독의 콜 총리와 통일협상을 제의하며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콜 총리는 경제적인 지원과 통일협상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동독 정권을 압박했다.

압박의 핵심은 공산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합법적인 권력을 동독에 창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자유선거가 치러졌고 반공산주의자였던 드메지어가 총리로 당선되었다. 이후 통일협상이 진행되었고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통일이 선포되었다. 이날은 우연히 개천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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