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내독성

박상봉 박사 2005. 10. 16. 09:48

내독성, 분단문제 전담

 

내독성은 1949년 서독정부 수립 직후 분단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였다. 기본법 전문에 명시된 분단극복을 그 사명으로 하고 대동독정책 담당부서였던 연방총리실과의 유기적 협조를 통해 대동독정책을 집행했던 기관이었다. 연방총리실이 대동독정책의 원칙과 동독과의 조정업무를 전담했다고 한다면 내독성은 그에 대한 세부사항을 주관해왔다.

이에 따라 내독성은 우선 동독 내 고립된 서베를린을 살리고 자유의 도시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연합국들과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만들었다. 1948년 6월 24일 소련과 동독에 의한 ‘베를린 봉쇄’가 취해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소위 ‘루프트브뤼케(Luftbruecke)’ 라고 하는 항공공급망 전략으로 대응해 이를 무력화시켰다.

 

내독성의 중요 업무는 동독과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교류의 주목적은 동서독 주민들과의 상호 이해를 높이고 양독 간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해주는 데 있었다. 양독 간 교류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는 청소년 상호교환 프로그램은 양독정부의 서로 다른 전략적 의도로 추진됐다. 서독정부는 청소년들을 동독에 파견해 동독과 서독은 영원히 분리될 수 없음을 일깨우고 당시 동독정부가 추구했던 분단고착화 움직임에 대응했다.

이러한 서독의 의도와는 달리 동독 정부는 청소년의 상호방문을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홍보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특히 서독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며 어린 청소년들에게 동독체제에 대한 우월성을 홍보하고자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은 스스로 동독체제를 경험할 기회를 얻었고 교류가 활성화될수록 서독 정부에 대한 상대적 신뢰가 쌓여갔다.

다른 한편 늘 당과 안전부의 흑색전선으로 국민들을 통제해왔던 동독정부는 서독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다.

 

내독성의 또 하나의 주요 업무는 동서독 간의 정보교류를 유지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동독은 전략적으로 정보를 엄격히 통제했고 초기의 정보교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독성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동서독간 정보교류를 확대토록 끈질긴 노력을 감행했다. 특히 1960년 이래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서 동서독 간 정보교환에 기여한 프로그램을 선정해, 초대 장관이었던 카이저 상과 초대 베를린 시장인 로이터 상을 수여하는 등 각종 장애요인에도 불구하고 양독 간의 정보교류가 지속토록 했다.

이 기회는 동독주민들을 점점 더 서독 매체에 의존토록 했다. 통제된 정보만을 접촉할 수 있었던 동독 주민들에게 서독매체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통일 전 동독 텔레비젼 수신자들의 90 퍼센트 이상이 서독의 공영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수신해 온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동독 주민들의 대부분이 서독의 8시 뉴스 방송을 통해 세계 정보를 접해왔다는 고백들도 바로 이러한 내독성의 노력에 기인한다.

그 외에도 특파원의 상호교환을 비롯한 언론인들의 활동이 양독 사회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나 자유로운 보도에 익숙한 서독의 언론인들과 동독정부와의 마찰은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했다. 동독의 붕괴는 이러한 끊임없는 교류의 필연적 결과였음이 이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IUED

 

 

 

◇ 내독성의 임무, 우리는 한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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