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통일총리 헬무트 콜

박상봉 박사 2005. 10. 15. 08:17
 

의지와 외교의 마술사 통일총리 헬무트 콜 (Helmut Kohl)

- 국제사회 입장 무리없이 조율 -


지난 2003년 9월 12일, 헬무트 콜 통일총리가 반세기 정치생활을 마감하고 의사당을 떠났다. 최장수 총리로서 통일 전후 16년을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며 독일민족의 최대 숙원이기도한 통일을 이루어낸 콜의 퇴임은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나도 쓸쓸했다. 당시 불거진 재임시절 비자금 스캔들과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의 결과이다. 

그의 쓸쓸한 퇴임은 1년전 7월 아내 한네로레 여사가 지병인 햇볕 알레르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억과 함께 정치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되 뇌게 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획을 그어온 정치인들의 말로가 늘 영예로운 것만은 아니었던 것처럼 콜의 퇴임도 이렇듯 조용하게 마감됐다.


하지만 그가 이루어낸 통일에 대한 업적에는 국내외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통일로 이루어낸 의지와 결단력에 대한 평가이다.

89년 11월 10일 격변기에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콜 일행은 일정을 중단하고 베를린 전쟁기념교회(일명 broken church) 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역사의 현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는 수 만 명에 달하는 동서독 주민들이 어울려 베를린 장벽철거를 환호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동독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며 “우리는 한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콜은 추후 이 역사적 현장에서 “통일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고 이후 ‘통일을 위한 10개항의 프로그램’을 제시해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동독공산당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국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어버린 공산당이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바웬사의 고백으로부터 공산당이야말로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 속에서 전통 우방임을 재확인하는 한편, 통일문제에 대한 미국의 양보를 얻어냈다. 90년 2월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협상을 벌여 소련이 독일통일에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 독일의 주변국들은 미소 강대국의 양보에 반대하고 나섰다. 대처 총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의 입장을 확인한 후 조건을 달았다. 독일이 통일을 이룬 후에도 나토회원국에 잔류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프랑스 역시 통일을 조건부로 승인해주었다. 그것은 서독이 통일과정에 지나치게 집착해 그동안 추진해오던 유럽통합 작업에 지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폴란드는 독일은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켜 유럽의 평화를 깨뜨려왔다며 통일은 당시 폴란드와의 오더 나이스 국경을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기도 했다. 콜 총리는 바로 이렇게 어려운 국제사회의 요구들을 무리없이 조율하는 외교력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콜 총리의 외교력은 통일에 대한 현실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동서독 주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낸 결과이다. 동독 탈출자들을 자국민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 그리고 인권의식과 국가관, 전통 우방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존중하는 외교, 이것이야말로 국민과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얻도록한 참된 이유이자, 정치가 콜의 지도력이었다.

IUED

 

 

부인 살아생전 단란했던 헬무트 콜 총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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