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자유법률가회 린제변호사 납치

박상봉 박사 2005. 10. 14. 08:40
 

‘자유법률가회’ 린제변호사 납치

- 감방동료도 슈타지 끄나풀 -


1952년 7월 8일 베를린 남부 리히터휄데(Lichterfelde) 지역에서 한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피랍자는 발터 린제(Walter Linse) 변호사로 ‘자유법률가회’ 부회장이자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인권변호사였다. 자유법률가회는 분단 후 동독공산당이 자행했던 재산몰수, 범법사례, 인권침해와 같은 사건들을 수집해 80여명의 회원들이나 필요한 기관에 알리고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당시 베를린은 냉전의 격전장으로 공산당에 의한 납치행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이들은 소련과 동독에 해가 된다고 여기는 인사들을 납치대상으로 삼았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4명의 괴한이 택시로 위장한 차량으로 접근해 저항하는 린제의 다리에 총상을 입히고 차량에 태워 도주했다는 것이다. 격분한 2만5천명의 시민들은 시청앞에 모여 슈타지의 만행을 규탄했다. 단상에 오른 한 연사는 “시민들에게 호신용 무기를 지닐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해 모인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의회도 특별회의를 소집해 항의서한을 보내는 한편 유럽공동체와 유엔기구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동독이 몰락한 후 7년째인 1996년에야 비로소 그 전모가 드러났다. 범인은 소련 KGB의 조정을 받은 동독의 슈타지였고 서베를린의 암흑세계를 다니며 상습적으로 납치극을 해온 크놉라우흐를 포함 4명을 사주해 일을 꾸몄다. 그 후 슈타지는 이들이 자백할 경우 입게될 정치적 타격을 막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해 위장신분증을 만들어주고 수시로 거주지를 옮기도록 했다.


린제 변호사는 납치 후 밤낮 없는 취조로 시달렸다. 취조 후 감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밀려드는 좌절과 공포 속에서 석방의 날만 고대했다. 어느 날 동료죄수가 들어왔을 때는 “이제 곧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린제는 이 동료죄수가 슈타지의 끄나풀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석방되면 수감생활에 관한 책을 저술해 베스트셀러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즉시 슈타지 상부에 보고됐다.

린제 변호사의 가장 큰 고통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하나하나 소속회원들의 신분을 밝혀야 했던 것이었다. 그는 이 고통을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표현했으며 슈타지는 고문의 강도를 더해가며 린제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 했다.


영원히 미궁에 빠질 뻔한 이 사건은 호네커가 몰락하고 통일이 이루어짐에 따라 밝혀졌다. 압수한 슈타지 문서에서 린제 변호사의 기록이 발견됐을 뿐 아니라 슈피겔 지는 러시아 당국의 허락을 받아 그의 재판기록을 확인했다. 확인 결과 린제는 52년 12월 3일 모스크바로 이관돼 다음해 12월 15일 부티르카 감옥에서 총살됐음이 밝혀졌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고교 졸업시절 묘비명에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 가다’ 라고 쓰이기를 꿈꿔왔던 린제의 묘는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다.

44년이 지난 1996년 5월 8일 러시아 당국은 발터 린제 변호사 사건을 무효처리하고 복권시켰다. 린제 변호사가 피랍됐던 게리히트 街는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 발터-린제 街로 명명되고 있다.

IUED

 

 

◇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당시 납치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독일분단극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독성  (0) 2005.10.16
통일총리 헬무트 콜  (0) 2005.10.15
슈타지총수 에리히 밀케  (0) 2005.10.13
교회밖의 시민운동 노이에스 포럼  (0) 2005.10.12
프로파간다 전쟁  (0) 200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