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다시보기

서독의 대동독정책(XVII): 분단국의 운명

박상봉 박사 2017. 2. 28. 13:39

서독의 대동독정책(XVII): 분단국의 운명

 

우리나라에 알려진 독일통일은 왜곡으로 얼룩져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장맛은 모른채 구더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이념적으로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함으로 완성된 통일을 수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독일어 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용, 재인용을 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가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는 통일의 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의 '베를린 장벽의 서사'에는 이런 오류가 도처에 담겨져 있다. 김영희의 에곤 바에 대한 집착이 독일 통일의 실체를 가리고 있다.




XVII

분단국의 국민과 민주주의가 헌법을 수호할 의지와 제도적 장치를 결여하고 있다면 상대국의 전략 전술에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 서독은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와 헌법수호청(Verfassungsschutz)은 물론 내무부 산하 정치교육센터를 두어 헌법정신을 배우고 생활 속에서 법치주의를 습득하고 있다. 반면에 베트남은 천민 민주주의로 헌법과 법치주의를 지킬 능력이 결여되었고 공산통일로 분단을 마감했다.

건전한 사회는 보수와 진보, 양 날개로 날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이념적으로 분단된 나라에게는 이다. 진보와 종북을 구별할 수 없다. 통진당은 더민주를 숙주로 정치권에 입성했다. 울산에서 더민주가 후보를 철회해 통진당원을 20대 국회에 진출시킨 일도 있다.

서독 연방정보국(BND)과 헌법수호청은 1974년 스파이 기욤을 검거했다. 헌재는 1952년 네오나치의 사회주의제국당(SRP), 1956년 독일공산당(KPD)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2016년 지금도 독일민족민주당(NDP)에 대해 위헌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 비록 좌파당이 등장해도 초법적, 반헌법적 활동을 할 여지가 없다.

서독은 통일 전 동독과 6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1, 2차 정상회담은 1970년 브란트 정권 때 동독 에어푸르트와 서독 카셀에서 열렸다. 3차 정상회담은 슈미트 총리가 동베를린을 방문해 호네커 총서기를 만나 이루어졌고 4차 정상회담은 호네커가 본을 방문해 콜과 추진했다. 1~4차 회담의 의제는 예외없이 분단 이슈였다. 국경지대에 설치한 기관단총 철거, 양독 시민들의 상호 방문확대, 베를린-서독 간 동행협정, 노약자 및 만성질환자의 서독 이주, 정치범 석방, 재야인사들의 서독 이주, 청소년 상호 교류 및 방문, 저널리스트 상호국 주재, 방송 교류 등과 같은 이슈들이 합의되었다.

5차 회담은 동독 급변사태 후인 19891219, 콜의 드레스덴 방문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호네커 후임 크렌츠가 등용한 모드로프 총리의 제안으로 성사되었다. 이 회담은 최초로 의제 속에 통일 문제가 포함되었다. 마지막 6차 회담은 동독 내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드메지어 총리와의 회담으로 통일협상이었다. 우리의 1, 2차 정상회담이 통일을 의제로 다루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 ‘NLL’ 등 초헌법적 사안을 논의했던 것과 대비된다.

 

201612월 대한민국 정치가 실종됐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며 대북 업적이 사장될 위기다. 야당의 역공이 도를 넘었다. 개성공단 재개, 이석기 석방, 재벌해체, 사드배치 반대 요구가 터져 나온다. 통진당 해산은 헌재와 박근혜 정권의 음모라는 주장도 나온다. 문재인은 탄핵이 기각되면 혁명으로 대통령을 퇴진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머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지만 가슴은 온통 붉게 물든 에곤 바의 추종자들도 생긴다. 원래 좌파 인사들은 그러려니 해도 보수를 자임했던 인사의 변심도 가관이다. 나경원 의원이 대표적이다. 나 의원은 국민정서상 5.24 조치를 해제할 수 없으니 그 조치를 뛰어넘는 남북 경협을 하자고 한다. 이해할 수 없다. 국민정서를 왜곡하자는 뜻으로 들린다. 5.24 조치는 천안함 폭침으로 희생된 46명 해병의 목숨과 애국심에 대해 조국이 내린 최소한의 보상이다.

좌파적 언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에곤 바가 이성마저 잃고 내뱉던 막말과 다를 바 없다. 그는 1996년 통일 후 6년이 지난 시점에도 “Von Konrad Adenauer bis Helmut Kohl waren alle Bundeskanzler inoffizielle Mitarbeiter des CIA”(아데나워부터 헬무트 콜에 이르기까지 모든 총리는 미국 CIA의 비정규 요원이었다)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김영희의 맹목적인 반미정서와 같다.


김영희는 사드와 관련해 미국 정부의 압력, 의회와 싱크 탱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군산복합체의 괴력을 당해낼 힘이 없다. 한국은 결국 한 세트 2조원이 넘는 사드를 최저 한 세트, 최고 네 세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미국을 안보장사나 하는 나라로 폄훼하고 있다..(그의 저서 '베를린 장벽의 서사' p.363)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탈북자가 10만 명만 와도 노숙자가 넘쳐날 것이란다. 이 주장에 어떤 가치도 철학도 없다. 인간애도, 인권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박대통령이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으로 오라고 하니 반대다.

독일은 2015년 통일 25년 차, 통일 후유증이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는데도 시리아 난민 등 110만 명을 수용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고 배부르니 난민이나 도와주자라는 식의 수용이 아니었다. 사지(死地)에서 방황하는 탈출난민들에게 생명의 동아줄을 던지는 심정의 결과였다. 독일에는 아직도 공공 체육관 등에 마련된 임시거처에서 지내는 난민이 부지기수다. 1219, 베를린 크리스마스 장터로 트럭을 돌진해 12명을 사망케 한 테러범은 튀니지 출신의 난민이었다. 친난민 정책을 추진했던 메르켈 총리의 4선 가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좌파 정당의 대부 브란트는 1961년 베를린 시장 재임 중이었다. 장벽이 세워지고 동독인들이 탈출하다 사살되는 장면을 보고 불법범죄행위에 대한 기록소 설립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니더작센 주 국경도시 잘츠기터에 중앙범죄기록소(Erfassungsstelle)가 세워졌다. 예산 25만 마르크의 초미니 기구였지만 동독은 늘 기록소의 해체를 요구했다. 1980년대 중반 콜 집권기, 사민당은 에곤 바를 중심으로 기록소 무용론을 제기하며 평화를 거론해 왔다. 실제로 1988년 노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요하네스 라우(Rau) 총리는 1988년 주 분담금 56천 마르크를 출연하지 않았다.

콜 총리는 연방예산으로 충당하며 초미니 비대칭무기를 유지했다. 통일 후 사민당의 포겔(Vogel) 대표가 이런 행적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기록소는 28년 동안 42천여 건의 불법범죄행위를 기록했고 동독 공산권력자들의 처리에도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대한민국 국회, 3월 북한인권법을 발의한 지 11년 만에 통과시켰다. 법은 9월에 시행되었지만 야당의 비협조로 인권재단은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 야당 몫인 이사 선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통일 후 대한민국 야당이 이와 관련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물론 연방제나 북한 주도의 통일이 아닐 경우다.


통일은 공짜가 아니다. 2,400만 북한 동포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일인데 공짜, 어불성설이다. 이런 가치관으로는 6.25 전쟁에 참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5만 명의 미군 장병 및 전 세계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통일은 가치와 의지의 문제다. ‘배부른 돼지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통일을 비용의 잣대로 저울질하는 한 한반도 통일은 요원하다. 누가 뭐래도 감당해야할 통일인데 긍정과 희망이 담긴 스토리가 없다.

여러 대내외 전문가들이 한국통일이 독일보다 쉽다고 응원하고 있다. 통일된 한국은 동북아 허브로서 침체된 경제를 풀어낼 유일한 미래다. (끝)

I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