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이해 오해

독일 정당별 대동독 및 통일정책

박상봉 박사 2016. 9. 2. 10:58

정당별 통일정책

 1. 기독연합당(CDU/CSU)의 통일정책

 

이글은 2005년 11월 23일 '독일통일과 정당'이라는 글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초대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 (CDU 19491963)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의 주 관심은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피폐한 경제를 회복시키고 발전을 이루는 데 놓여있었다. 전범국으로서의 상처를 씻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마샬플랜을 통한 경제재건이었다. 이 정책은 성공적이었고 이 시기 서독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성과에 따라 아데나워 수상은 무려 14년간 총리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반면 동독과 동유럽에 대한 서독의 입장은 강경노선 일변도였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할슈타인 독트린으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나라와 서독은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다라는 강경책이었다.

하지만 아데나워 수상 1955914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후르시초프 당서기와 관계정상화와 외교관계 수립해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전쟁포로 교환석방을 성사시키는 성과도 이루었다. 당시 소련과의 관계개선은 할슈타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소련은 전승국으로서 소련과의 외교관계는 예외로 간주했다. 할슈타인 원칙으로 동독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서독에도 적지 않는 불이익이 있었다. 3세계 국가들이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위협을 제기해 서독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요구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소련과 동독정부의 끊임없는 요구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아데나워 수상은 61년 빌리 브란트 당시 베를린 시장의 요구에 따라 니더작센 주 잘츠기터(Salzgitter)에 중앙범죄기록소를 설치했다.

 

주요 정책 및 사건

1. 19511122, KPD(공산당)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해 1956817일 기본법(Grundgesetz) 212항에 의거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문은 KPD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하고 있어 자유민주질서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2. 1952526, 유럽공동방위체 가입승인, 사민당(총재 Kurt Schumacher)은 이 조약으로 통일의 희망 사라졌다고 거세게 항의했으며 거리에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3. 자민당(총재 Thomas Dehler)1958125일 스탈린의 제의를 무시하고 유럽방위공동체에 가입하므로 통일의 기회가 무산되었다고 아데나워 수상의 사퇴를 주장했다. 1952년 스탈린은 서독이 어떤 군사동맹체제에 소속되지 않을 경우 독일통일과 독일군 창설에 동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아데나워 수상은 스탈린의 제의를 소련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려는 속셈이라며 대응했다.

4. 1961813일 동독 공산당 정권은 전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5. 1962817, 베를린 장벽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페터 훼이터(Peter Fechter)라고 하는 18세 청년이 베를린 장벽을 넘다 동독 국경수비대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훼이터는 총격을 받고 쓰러져 1시간이나 방치된 채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이 소식이 전세계 언론으로 전파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6. 1964913일 당시 20세의 동독청년 탈출하다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으나 서독의 대응사격과 미군의 도움으로 탈출에 극적으로 성공했다.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총리 (CDU 1963 1966)

 

1963년 아데나워에 이어 연방총리직에 오른 에어하르트(CDU)는 아데나워 초대총리의 정책을 이어 발전시켰다. 아데나워 정부 하에서 경제장관을 역임한 경력을 발판으로 독일에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며 경제발전에 매진했다.

독일문제에 있어서는 전독성(동독이 전체 독일을 대표하는 의미가 있다고 항의, 브란트 정권 하에서 내독성으로 개명)으로 하여금 동독 내 정치범을 적극적으로 석방해 이주시키는 일을 추진했다. 작센 바우첸이라는 지역에는 슈타지(국가안전부) 총수 에리히 밀케(Erich Mielke)의 개인 교도소라 불리는 공포의 감옥이 있었다. 이 감옥의 특징은 특별한 고문이나 구타없이 한 인간을 파괴한다는 데 있었다. 국가사범이나 정치범들은 공포의 대상은 벙커호랑이장으로 부르는 가로 2.5 m, 세로 1.5m 크기의 독방이었다. 이들은 격리 수용되어 인간이 스스로 파멸되는 일을 수시로 겪어야 했다. 물론 동독의 형법은 독방 구금일수를 21일로 제한하지만 교도관들은 22일째 하루 풀어준 후에 다시 이들을 격리 수용함으로 법을 교묘히 피해가며 수감자들의 혼을 파괴했다.

슈타지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995월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동독 시절 유르겐 훅스, 루돌프 바로, 게룰프 판나흐 등 3명의 정치사범들이 백혈병을 앓아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당시 동독 슈타지가 교도소 내에 정치범들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사선기를 설치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그리고 당시 수감자 200명들의 관련 증언을 보도했다.

동독 내 정치범들의 실상을 접하게 된 서독 정부는 60년대 초 서독 출판계의 거부 악셀 슈프링거의 참여 하에 동독 정치범 석방을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루드비히 레링거(Ludwig Rehlinger) 내독성(전독성) 차관은 동서독 간 공식적인 관계가 수립되기 전인 1963년 가방에 10DM를 넣고 동베를린을 찾아 최초의 정치범 석방을 성사시켰다.

전반적으로 대동독 정책에 있어서는 전임총리의 강경일변도의 정책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 1966325일 세계를 향해 독일국민은 분단극복을 위해 주어질 희생을 감당할 용의가 있으며 독일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평화선언을 발표해 보다 적극적이고 그러나 평화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했다.

 

주요 정책 및 사건

1. 1963. 12. 20 1964. 1. 5 크리스마스 기간에 100만 건의 동베를린 통행증 발급되어 많은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다.

2. 동독 연금수령자(고령자)의 서독방문도 허용되기 시작했다.

3. 19638월 루드비히 레링거(Ludwig Rehlinger) 내독성차관은 10DM을 넣고 동독을 방문해 정치범 석방의 물꼬를 텄다.

4. 1964121일 동독 공산정권은 방문객에 DM화 강제교환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 총리 (CDU 1966 1969)

 

키징거 정권은 소위 대연정이라 불리는 기독연합당과 사민당 간 연합정부였다. 기민련의 키징거가 수상직에 오르고 사민당의 브란트는 외무장관직을 맡았다. 키징거의 대외정책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정책이 유럽의 화해와 긴장완화 보다 우선권을 가졌다고 한다면 키징거 정부는 유럽의 화해와 긴장완화가 독일통일에 우선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독일통일을 통한 유럽의 긴장완화정책에서 유럽의 긴장완화를 통한 독일통일 실현이라는 정책으로 바뀐 것이다.

할슈타인 원칙이 포기되고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고 동유럽 국가와의 새로운 관계모색을 추진하게 되었다.

 

통일총리 헬무트 콜(CDU 1982 1998)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은 1982년에 집권한 기민당(CDU)의 콜 수상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83년 동독이 재정악화로 국제사회에 지불불능 상황에 처하자 10DM 차관을 긴급제공하고 당시 이미 8년이나 중단되었던 문화협정을 재개하고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기관단총을 부분적이지만 해제토록 했다.(상호주의) 그리고 다음 해인 84년 또 다시 9.5DM 차관을 제공하며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자동발사장치를 완전 해체토록 했다. 또한 이산가족의 동독방문 기회를 획기적으로 늘려 84년 동독정부가 총 34,900건의 방문을 허가하기도 했다. 이 수는 전해인 83년도에 허가한 방문자 수 7,700명의 거의 5배나 달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동독정부의 방문허가는 방문자들의 강제환전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독을 방문했던 수십만의 친척과 친지들이 동독인들에게 전달했던 액수는 거의 640D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금액은 분단시절 서독에서 동독으로 유입된 총액의 거의 63%에 달하는 규모로 동독주민들의 당 의존도를 낮추고 향후 동독 체제전환의 원동력이 되었다.

콜 수상의 통일정책의 특징은 1989년 동독인들의 조직적인 탈출이 시작되면서 발휘되었다. 그때까지의 통일정책이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ehrung)'라는 원칙 하에서 끊임없이 동독과 접근하며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이었다면 이 시기 콜의 통일정책은 변화를 통한 접근(Annaehrung durch Wandel)'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대규모 탈출의 결과는 동독은 1989119일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게 되었고 이어 호네커 총서기가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이런 혼란기에 콜 수상은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고 1990312일 동독 내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10개항 프로그램) 선거결과 드메지어 수상이 선출되었고 콜 정부는 드메지어 정부와 통일협상을 추진해 통일조약을 체결하고 동독이 서독연방에 편입되는 형태로 통일이 성사되었다. (동독 민주정권 창출)

콜 정부의 탈출자 보호정책,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소련을 차례로 설득하고 영국, 프랑스, 폴란드의 요구를 수용하고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통일외교는 많은 교훈을 준다.

 

주요 정책 및 사건

1. 재임 초기 1983, 84년 각각 10억 마르크, 9.5억 마르크의 차관을 동독에 제공해 지불불능에 처해있던 동독정부를 돕고 반대급부로 여행통제 완화하고 8년간 중단됐던 문화협정 재개하도록 했다. 국경 자동발사 기관단총도 차관 제공을 계기로 해체되었다.

2. 198446일 동독주민 35명이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탈출해 서독에 무사히 입국했다. 그리고 625일에도 동독인 55명이 베를린 주재 서독대표부에 진입하는 일이 일어나 대표부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했다.

3. 198767일 서베를린 제헌의회(Reichstag) 앞 잔디광장에서 록 콘서트 개최되었다. 3천여명의 동독 청년들이 록 콘서트에 참석코자 베를린 장벽 뒤로 모여들었고 장벽 철거를 부르짖는 시위를 벌였다.

4. 198797- 911일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해 환경분야 등 여러 협정을 체결했다.

5. 1988331일 동독 96.7 헥터아르에 달하는 비거주지역을 76천만 마르크를 받고 서베를린에 양도했다.

 

 

2. 사민당(SPD)의 통일정책

 

빌리 브란트 총리 (SPD 1969 1974)

 

최초의 사민당 정부였다. 브란트의 대외정책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해 그동안 서방세계에 편중된 독일의 외교정책의 균형을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012월에는 바르샤바를 방문해 나치 희생자 묘역에 무릎을 꿇는 용기를 보였다. 이 사건은 독일을 전범국이라는 오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했으며 독일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돌려놓았다.

대동독정책은 소위 ‘Kontinuität und Erneuerung (지속과 혁신)’이라는 구호 속에 보다 적극적인 접근을 추진했다. 소위 ‘Kontinuität(지속)’이라는 의미 속에서 기존의 동독관을 유지했고 ‘Erneuerung(혁신)’이라는 의미 속에서 새로운 동독관을 첨가했다. 즉 동독을 독일 땅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기존의 대동독관을 유지한 조치였다. 브란트는 691028일 정부의 공식성명을 통해 동독관의 변화가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발표한 바가 있다.

브란트는 동독을 외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독일 땅에 존재하는 제2의 국가로 서독과 특수한 관계에 있다고 정의하고 1970319일에는 내각수반으로서 최초로 동독을 방문했다. 이의 답방으로 그해 521일 슈토프 동독총리가 서독의 카셀을 방문해 2차 회담을 가졌으나 슈토프가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을 다시 요구해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다. 하지만 정상회담 이후 양독관계는 서서히 진전되기 시작했다. 19721221일에는 동서독 간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기민련은 기본조약이 반헌법적이라며 헌재에 소원을 제기했지만 헌재의 판결은 합헌이었다. 동서독 사이에 기본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 만으로 서독정부가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동서독 사이에는 통행협정, 통신협정, 청소년 문화교류 등 다양한 협정들이 체결되었고 동서교류의 물꼬가 트기 시작했다. 19733월부터는 서독의 공영방송인 ARD, ZDF와 서독의 신문들이 동독에 특파원을 파견해 언론교류가 시작됐다.

브란트의 적극적인 대동독 정책은 간첩 기욤의 스파이 행각이 드러남에 따라 브란트가 사퇴함으로 공백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듯 동서독 간의 교류와 협력은 헌법수호청과 연방헌법재판소의 엄격한 감시 하에 이루어졌다.

 

주요 정책 및 사건

1. 1970319일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동독 에어푸르트를 방문해 동독 슈토프 총리와 회담을 개최했다. 슈토프 총리의 답방은 1970521일 서독 카셀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담을 통해 동독은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나 서독정부의 거부로 별다른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2. 197153일 동독 에리히 호네커,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됐다.

3. 19721221일 동서독 간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동서독은 선린우호 이웃관계임을 선언하고 73918일 유엔동시가입, 그리고 74620일에는 상설대표부 교환했다. 대사관을 교환하지 못한 것은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빌리 브란트의 총애를 받던 총리실 기욤의 스파이 혐의가 밝혀져 197456일 브란트 총리가 사임했다.

5. 197412월 서독 제1공영방송 ARD 동독 특파원 뢰베(Loewe)의 추방(73. 3월부터 주재) 사건이 발생했다. 추방 이유는 동독의 체제비판가 로베르트 하베만과 인터뷰였다. 인터뷰는 동독 체제에 대한 비판 가수로 알려진 비어만의 서독순회공연과 시민권박탈 그리고 동독귀환금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동독 내 유명인사, 예술가, 작가들이 최초로 대정부 시위를 벌였다.

6. 197193일 베를린협정이 체결되었다.

7. 1971930일 동서간 우편통신 협정과 1217일 통행협정이 체결되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 (SPD 1974 1982)

 

브란트의 대동독 정책의 승계 하에 꾸준한 동서 접촉이 이루어져 왔다.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고 동서독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화해 분위기 속에서 슈미트 수상은 특별한 대동독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1976년에는 동독인권에 대한 유엔의 경고가 잇따라 동독이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19811211일부터 13일까지 동서간 정상회담(슈미트와 호네커)이 극적으로 성사되었으나 동독이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해 회담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주요 정책 및 사건

1. 1981121113일 서독의 슈미트 수상과 호네커 총서기 간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2. 동독의 국제법상 국가인정 요구로 회담의 성과는 없었다.

 

게어하르트 슈뢰더 총리 (SPD 1998 2005)

 

1990103일 통일된 이후 시대를 이끌고 있다. 최근 통일의 후유증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대규모 실업과 경제회복을 달성하지 못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슈뢰더 총리는 7년간의 집권을 끝으로 20051122일 수상직을 기민련(CDU) 메르켈에게 넘겨주었다. 다만 그의 재임 중 페터 하르츠 노동개혁 위원장은 강력한 노동개혁인 하르츠IV를 추진해 통일 후유증 치유에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민당 정권의 신의 한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의 이념과 지지세력을 초월해 국가적 현안에 힘을 결집하는 정치권의 모습은 독일 연방제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3. 2016년 메르켈 연방정부

 

현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는 2005년 선출된 이후 3선에 성공해 11년째 연방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동독출신 총리이며 전후 독일의 최연소 총리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메르켈 총리의 나이는 당시 51세였다.

통일 26년 차 독일은 많은 통일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유럽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메르켈 총리는 강력한 난민 친화적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대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은 물론 동독 주와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2015년 독일이 수용한 난민은 110만 명에 달한다. 메르켈은 2016년 12월 6일 2017년 선거에 기민/기사련 총리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되면 메르켈의 총리 재임기간은 콜 총리의 16년과 타이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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