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베를린 봉쇄와 서방의 공중다리

박상봉 박사 2005. 10. 7. 21:43

 

베를린 봉쇄와 서방의 ‘공중다리’

 

전후 패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소련 등 전승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소련의 점령지역 내에 위치한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어 서베를린은 서방연합국의 관할 하에 놓였다.

미국 외무장관 마샬은 전후 유럽의 경제회복 프로그램인 마샬 계획을 수립 유럽 및 독일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반면, 소련은 독일경제위원회를 창설해 소련관할지역경제를 하나로 묶어 중앙집권화 했다.

이런 가운데 48년 6월 20일 서방연합국은 관할지역 내 화폐개혁을 단행해 기존의 제국마르크화를 10대 1로 평가절하했다. 이 조치는 베를린 전지역을 동독의 마르크화의 통용지역으로 만들려던 소련의 의도와 상충되었고 소련은 6월 24일을 기해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철도, 수로 및 도로교통망 등 모든 연결통로를 차단했다.

 

당시 소련은 서베를린을 이념과 체제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국가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서방연합국들은 중립화 의도야말로 베를린을 공산화하려는 소련의 음모라고 단정, 서베를린에 자유와 시장경제가 보장되도록 했다.

베를린 봉쇄조치가 이루어지자 미군 행정관 클레이 장군은 즉시 워싱턴 정부에 무력으로라도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막아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미국정부는 이에 대해 ‘공중다리’(Luftbruecke)를 만들어 대응토록 했다. 

‘공중다리’는 봉쇄조치로 어려움을 겪는 베를린 주민들에게 생필품을 비롯한 모든 필요한 것들을 항공기로 공급해 소련의 조치에 정면대응하는 것이었다. 초기에 C-47기에 의존했던 화물수송기도 수송능력 6배나 큰 C-57기로 대체됐고 영국 수상비행기도 공중다리에 투입돼 베를린 최대 호수인 반제(Wannsee)와 하벨(Havel) 강을 이용해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베를린 자유대학과 베를린 발전소가 이런 공중다리의 작전 중에 지어졌고 이를 위해 C-82 화물선이 투입돼 1,500톤의 건축자재가 수송되었다.

1948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소위 ‘산타클로스 작전’이 추진됐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시민들이 정성스럽게 포장한 53,000개의 선물꾸러미를 베를린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눈물겨운 일들도 ‘공중다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베를린 아이들에게는 게일 핼버슨(Gail Halvorsen)이라고 하는 파일럿은 영웅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초콜릿과 캔디로 낙하산 모양을 만들어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할 때 아이들에게 뿌려주며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북돋아 주었다. 이 일로 템펠호프 공항에는 종종 어린아이들이 집결해 ‘초콜릿 비행사’를 기다렸다.

‘공중다리’는 1949년 1월 10일 미국 화물기 C-54기가 225차례 투입되고 4월 16일 부활절 퍼레이드에는 총 1,398건의 비행기가 투입돼 1분에 한 대꼴로 물자를 수송해 하루에 총 12,000톤를 공급함으로 그 절정을 이뤘다. 또한 ‘공중다리’는 여러 기록들을 남겼는데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푼 1949년 5월 12일까지 총 279,962 차례의 항공기 운항을 통해 총 2,342,257톤의 생필품을 베를린에 공급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인력이 총 57,000명이었고 총 비행거리 1억7500만 킬로미터를 기록했다.

 

지금도 베를린 시내 템펠호프(Tempelhof) 지역에 가면 ‘공중다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남아 당시의 역사적 기억들을 되새기고 있다. 섬 도시 베를린은 이런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에 의해 지켜졌고 오늘날 통일독일의 수도로 동서 유럽을 관통하는 중심지로 발돋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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