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에는 자유선거가 실시돼 로타 드메지어(Lothar de Maiziere)를 최초의 합법적인 총리로 선출했다. 그 후 동서독 통일협상은 급진전 되었고 화폐통합을 거쳐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통일을 이루어냈다.
우연스럽게도 개천절인 이날은 독일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날이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동서독 주민들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앞 광장에 모여 감격스러웠던 통일의 순간을 기념하고 있다. 초대형 국기가 나부끼고 여기저기 샴페인과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당시 망치로 베를린 장벽을 부수며 감격해하던 순간들을 회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독일 역사상 매우 뜻 깊은 날인 10월 3일 이외에 독일역사에 있어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날은 하루 전날인 10월 2일이다. 이날은 통일기념식 전야제가 열린 날로서 과거 40여년 지탱해 왔던 동독이라는 국가를 마감하는 날이기도 했다.
서독의 콜 총리, 빌리 브란트, 바이젝카 대통령, 겐셔 외무장관 등 당시 통일의 주역들은 물론이고 동독에서도 드메지어 총리를 비롯해 동독의 주요 인사들이 이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했다. 동베를린 아카데미 광장에 위치한 샤우슈필하우스에서 거행된 이 전야제의 하이라이트는 동독 최초로 자유선거에 의해 선출된 드메지어 총리의 연설이었다.
단상에 오른 드메지어 총리는 “이별은 슬픔을 뜻하지만, 오늘 이 순간 과거 암울했던 동독과의 영원한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벅차오르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라는 고백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지휘자인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해 기쁨의 순간을 마음껏 선율에 담았다.
이렇듯 이별의 자리가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해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킨 동독국민들이 바로 분단 40년 만에 통일의 기적도 만들어낸 주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에 모여 촛불시위를 주도했고 여행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끌었다. 이 촛불시위는 월요데모로 발전했고 매주 월요일마다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월요데모의 구호는 초기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서독여행을 보장하라’와 같은 구호에서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 라는 구호를 거쳐 ‘우리는 한 민족이다’ 라는 구호로 변해갔다. 이 구호 속에서 점차 통일의 기운을 엿보기 시작한 콜 총리와 서독국민들은 동독 동포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고 동독 지도부의 퇴진이 이루어졌다. 콜 총리는 최초로 자유선거에 의해 선출된 드메지어 총리와의 통일협상을 주도했고 동독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동독을 서독연방에 편입시켰다.
이렇듯 동서독 통일은 자유를 찾아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준 동독주민들과 이들을 보호하고 동포애로 감싸 안은 서독사회의 국가관과 가치관이 합작해낸 결과이다. 북한 동포의 절규에 무심하고 남한사회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추진되는 정책들로는 ‘이별, 그 다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I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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