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분단극복

적군파의 태동과 몰락

박상봉 박사 2005. 10. 6. 18:40

 

적군파(RAF)의 태동과 몰락

 

분단시절 서독체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위협은 서독 내 좌익테러단체인 적군파의 존재였다.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는 70년 5월 14일 베를린 테겔 감옥에 수감돼있던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를 무력으로 구출해내면서 국가권위에 대항하는 본격적인 테러조직으로 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바아더는 68년 프랑크푸르트 시내 백화점 2곳을 테러 방화한 혐의로 체포, 수감 중이었다.

탈옥 작전은 저널리스트 마인호프와 변호사 말러에 의해 주도됐고 작전 중 1명이 사망하는 등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마인호프는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잡지 ‘콘크레트 Konkret’ 지 기자로 당시 백화점 테러방화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도했으며 말러는 수감 중이던 바아더의 변호인이었다.

 

초기 적군파의 핵심 멤버였던 이들은 탈옥 후 함께 요르단으로 도주,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을 통해 무력투쟁에 대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투쟁방식은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모형으로 서독의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대한 무력투쟁을 전개코자 했다. 이를 통해 적군파는 대중을 혁명세력으로 규합코자 했으며 혁명완수를 위해 제3세계 해방운동 세력들과 연계해 활동키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말 바아더와 마인호프 등 핵심요원들이 루프트한자 납치에 실패한 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슈트트가르트 슈탐하임 감옥에서 자결하자, 남은 요원들이 동독으로 잠입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지원을 받아 92년 4월 해체될 때까지 끔찍한 테러의 주범이었다.

70년대에는 검찰총장 부박, 기민련 베를린시 총재 로렌츠, 독일 사용자협회 슐라이어 회장을 납치 살해한데 이어 80년대에는 지멘스 사의 벡쿠르츠 이사, 르노 자동차회사의 베세 사장, 도이치뱅크 중역이자 다이믈러 벤츠사의 감사위원장 헤어하우젠을 암살했다. 또한 나토 사령부와 미군기지도 이들의 테러목표가 됐고 수차례 은행이 습격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들어 통일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독경제 재건에 헌신했던 로베더를 암살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능력을 갖추고 지식인들의 동정을 구했으며 한때 적지 않은 서독 지식인들의 동정을 받기도 했다. 이 사실은 80년대 중반 이들의 활동을 주제로 한 ‘슈탐하임(Stammheim)’이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어 대상인 ‘골든베어’ 상을 수상했다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이 영화는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한 영화관에서 경찰의 삼엄한 경비 하에 상영됐다.

하지만 이 모든 반체제적 활동은 80년대 후반, 소련이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다투어 체제전환을 추진하는 시대적 요구와 함께 서서히 약화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대규모 탈출을 시도한 동독인들의 의지는 적군파의 존립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으며 테러를 통한 체제전복이 얼마나 무의미한 지를 스스로 깨닫토록 했다.

바아더의 변호인이었고 적군파의 핵심요원이었던 말러가 97년 ‘디 짜이트’ 지에 요르단에서의 무장훈련 경험이 자신이 적군파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됐음을 밝힌 것도 이에 대한 결과이다.

그는 현재 ‘국가를 위하여 Fuer unser Land‘라는 시민운동단체를 발족해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I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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