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컬럼 및 논단

통일부, 왜 독일통일사례를 삭제했나?

박상봉 박사 2019. 5. 4. 10:15

통일부, 왜 독일통일사례를 삭제했나?

 

최근 통일부 통일교육원이 교재에서 독일통일사례를 삭제했다. 좌파 김연철 장관이 임명된 후 첫 업적인가요. 삭제한 것이 아니라, 은폐한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통일은 독일을 최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서독의 총리가 베를린을 방문할 때도 소련의 허가를 받고 팬앰, 브리티시 에어웨이, 프랑스 에어라인을 이용해야 했다. 콜 총리는 1989119일 폴란드 국빈 방문 중 베를린 장벽이 붕괴 소식을 듣고 베를린 행을 서둘렀다. 하지만 총리 전용기가 동독 상공을 비행할 수 없어 월터스 미국 대사에게 도움을 청해 미공군기를 빌려 탔다.

이런 서독의 정치적 위상이 통일 후 180도 변했다. 푸틴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가하면 크림 반도를 공격해 병합하자 유럽을 주도해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만들어냈다. 통일 된 독일의 경제는 고용상황에서도 보듯이 최강이다. 2060년까지 향후 40년 동안 매년 26만 명의 해외 노동력을 수입해야할 정도다. 이것이 독일통일의 실체이자 진면목이다.

분단국 우리가 마땅히 연구 분석해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삼아도 모자랄 판에 교재에서조차 빼버렸다. ? 이럴까. 좌파 정권이 왜곡해온 독일통일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좌파 정권은 두 가지를 왜곡해왔다. 통일비용과 이등국민 문제다. 통일비용에는 천문학적 비용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동독인에게는 이등국민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두 가짜로 드러나고 있다.

통일비용은 초기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동독이라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찬란한 보석으로 바꾸었다. 동독의 인적자원은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였고 침체에 빠졌던 서독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동독인에게 덧씌운 이등국민 프레임도 가짜였다. 메르켈 총리, 가우크 대통령, 티에르제 하원의장, 슈톨페 주지사 및 연방교통부 장관, 비어틀레 청장 등은 모두 동독이 배출한 인물로 통일독일을 이끌고 있는 주역들이다. 이렇듯 과거 정권이 만든 독일통일이 가짜임이 드러나게 되자 아예 사례조차 연구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통합-통일 vs 통일-통합 모델

 

독일통일을 회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통일방안 차이 때문이다. 독일은 작은 통일-큰 통일을 거부했다. 우선 동독에 정치적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산권력의 개입을 차단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합-통일 모델과 전혀 다른 통일-통합 모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라는 개혁 개방의 물결이 체코, 폴란드, 헝가리를 거쳐 동독에 상륙한 것은 1989년이었다. 공산당에 저항하는 시민단체들이 만들어지며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다. 매주 월요일, 거리는 시위대로 채워지며 소위 월요데모가 조직화 되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공산정권에 저항하며 자유를 외쳤다. 당시 시민단체를 이끌던 인물이 바로 메르켈, 가우크 등 통일된 독일을 이끌고 있다.

초기 동독 호네커 총서기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를 강력히 진압하려 했다. 마치 1953년 소련군 탱크가 저항하는 동독주민들을 짓밟았던 것처럼 초강경 대응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서독 콜 정부는 동독에 대한 강력한 견제를 보내며 동독의 상황을 일일보고 형태로 미국에 보고하며 지지를 받아냈다. 미국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소련 고르바초프와 말타에서 군축회담을 열며 화합을 과시해 주었다.

다른 한편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19891024, 동베를린에서 열린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해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자, 인생이 벌할 것이라며 월요데모 시위대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고르바초프의 지지를 기대했던 호네커의 위상은 급락했고 스스로 당을 떠나야 했다. 그 후 불과 한 달이 채 안 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1989119일이었다.

동독 공산당은 급히 궤도를 수정, 크렌츠에게 당의 권력을 위임하고 개혁공산주의자 모드로프를 총리에 임명하며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드로프는 콜에게 통일을 논의하자며 우선 사태 수습을 위한 긴급자금 150억 마르크(한화 75천억 원)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콜은 통일방안 10개항 프로그램을 역제안하며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긴급자금 건에 대해서는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가능하다고 맞받았다.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먼저라는 의미였다.

결국 모드로프 정권은 콜의 제안을 수용해야 했고 1990.3.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를 치렀다. 자유선거 결과 반공 지도자들이 압승했다. 민사당으로 개명하고 선거에 출마했던 동독 공산당은 16%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40년 동독 공산정권이 국민의 심판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청산된 공산권력은 동독재건과정에 별다른 개입을 할 수 없었으며 서독의 최고의 기술과 경영진들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찬란한 보석으로 만들어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된 독일의 실체이다. 통일부가 이런 주옥같은 독일통일의 성공사례를 은폐하려 작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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