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 역사

20세기 현대사의 기적: 독일통일 및 시사점

박상봉 박사 2017. 4. 21. 09:20

20세기 현대사의 기적

독일통일 및 시사점

 

본 글은 2015년 Jesus Army에 실린 원고를 수정 보완해 다시 게재한 것이다.

I.

<니콜라이 교회 평화촛불기도회>

동독 라이프치히에는 <니콜라이 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있었다. 작지만 20세기 독일 역사를 주도할 만큼 강했다. 1981년부터 매월 1회 평화 촛불기도회를 열었다.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는 침묵 기도회로 비폭력 평화 원칙을 준수했다.

198994일 월요일, 이 기도회가 최초로 거리로 나선 날이다. 기도회를 끝내고 1천여 명의 회원이 거리로 나가 “Wir sind das Volk!"(우리가 국민이다)를 외치기 시작했다.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로 공산독재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 되었다는 신호탄과 같았다.

이 시위는 월요일 마다 반복되며 월요데모로 불렸다. 월요데모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했고 시위 7번째 만인 1016, 20만 명의 규모로 급증했다. 그 후 3일 만인 1019일 당서기장 호네커가 사퇴했다. 20일 후인 11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독일통일은 기적이다. 전범국이자 홀로코스트로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독일이 통일을 거론한다니, 어불성설이었다.영국, 프랑스, 폴란드는 물론 모든 유럽 국가들이 반발했다. 전후 미···소 전승국들이 독일을 동서로 갈라놓은 것도 하나 된 독일에 대한 경계의 의미였다. 이런 이유에서 서독에는 통일부와 같은 부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독성>이 있어 분단의 현안들을 처리해왔을 뿐이다.

분단 기간 서독은 해마다 평균 20만 명의 동독탈출자를 받아들였다. 1949 ~ 1961년까지 거의 250만 명을 수용했다. 동독은 1961년 대규모 엑서더스를 막기 위해 장벽을 세웠다. 이렇게 한 달 만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탈출자는 급감했고 이후 동독탈출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래도 탈출자는 중단되지 않았다. 숫자가 90%가 줄어 매년 2만 명이 넘어왔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동독이 부담스러워 했던 장애인, 노약자, 병약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은 그런데도 서독사회는 동독탈출자 수용을 거부하지 않았다. 서독 경제도 활성화 되었다는 것이다. 스페인, 유고 등지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였고 우리나라에서도 광부와 간호사를 초청해서 일손을 보태야 했을 정도다.

 

II.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개방: 동서독 외교전쟁>

월요데모는 1989년 여름부터 동독탈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88일 동독인 131명이 동베를린 서독대표부에 진입을 시작으로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대표부에 수천 명의 동독인이 진입해 서독 행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서독의 <헬무트 콜> 정부는 모든 탈출자들을 서독으로 불러들였다.

819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범유럽 유니온과 헝가리 평화단체가 주관하는 평화축제 행사가 열렸다. 동유럽 각국 청년들이 참가했으며 동독 청년도 600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행사가 끝나자. 동독 참가자 600여명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동서독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었다.

서독 콜 총리는 즉시 특사를 파견해 600명 전원을 서독으로 불러들였다. 또한 헝가리 정부를 상대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영구 개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동독도 전면에 나서 헝가리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동독 정권은 과거에 체결한 헝가리-동독 국경조약을 내세워 국경 개방에 반대했으며, 이를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강력 반발했다.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이었다.

하지만 헝가리 네메츠 총리와 기율라 호른 외무상은 1989911일 대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을 결정, 서독의 손을 들어주었다. 헝가리 정부에게 이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호른 외무상은 통일 후 독일의 최고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인터뷰 기사가 무려 7~8 페이지에 달했다. 그는 또한 퇴임 후 집필한 저서 ‘Freiheit, die ich meine’(내가 의미하는 자유)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이라는 역사적 결단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후 10월 말까지 불과 50여일 만에 이 루트를 통해 24천여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고르바초프가 동유럽에 개혁 개방의 바람을 몰고 왔다면 헝가리는 철의 장막이라는 현실적 장벽을 허물어낸 셈이었다.

 

III.

<교회, 프라이카우프>

분단 시절 동독 교회는 일정 범위 내에서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서독 교회의 재정 지원이 동독 교회의 힘을 키워 가능한 일이었다. 동독 교회는 반체제 인사들의 피난처였다. 교회의 도움으로 재산을 공산당에 헌납하고 서독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최전선에서 이 일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만프레드 슈톨페> 장로였다. 그는 통일 후 브란덴부르크 주 지사와 연방 교통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동독 호네커 정권은 또한 국제사회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해왔다. 1983년 마틴 루터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가 비텐베르그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호네커는 동독이 당당한 국가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이 행사에 서독 칼 카르스텐스(Karl Carstens) 대통령이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카르스텐 대통령이 이에 응하지 않아 동독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루터의 출생지인 비텐베르그에는 500주년을 기념해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2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천들이 모였다. 동독인들은 이들의 기도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품을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서독 교회는 동독 내 정치범들에게 주목하고 석방하는 일에 나섰다. 서독 내독성이 주관하는 사업이었지만 동독의 요구로 교회나 나선 것이다. 이른 바 프라이카우프’(Freikauf)였다. 돈 주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사업이었다. 프라이카우프는 1961년부터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8년 동안 지속되었고 약 34,000명이 해방되었다. 내독성은 1명 당 평균 9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동서독 교회가 통일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IV.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의 월요데모를 통일로 이끌었다. 서독 사회에서 바보 총리의 이미지가 강했던 총리의 탁월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통일 리더십이었다. 이미 헝가리-오스트리아의 국경 개방을 성사시킨 콜의 보폭이 바빠졌다.

동독 사태를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공유해온 콜은 미국의 신뢰를 바탕으로 대소련 통일외교에 박차를 가했다. 향후 독일문제를 독일민족이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동의를 받아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1989년 가을부터 모스크바를 수시로 방문해 외교적 접촉을 이어온 콜 정부가 19907월 통일의 최대 고비인 소련의 벽을 넘었다. 콜과 고르바초프의 코카서스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와 말타 회담을 열고 군축방안을 논의해 평화적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콜의 대동독정책의 첫 발은 동독 내 주권회복과 반공 운동의 에너지를 모아 공산정권을 압박해 민주적 권력을 창출해 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모드로브 총리와 정상회담을 열고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를 실시토록 유도했다. 1990318일 자유선거가 치러졌고 최초의 민주정권인 <드메지어> 정권이 탄생했다.

콜은 동독 최초의 민주적 권력인 드메지어 총리와 협상을 추진해 통일의 일정을 만들어 갔다. 이런 가운데 동독 인민회의는 1990823일 임시회의를 열고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동독은 1990103일을 기해 서독 연방체제에 편입할 것을 선언한다는 의결이었다. 의사당 시계는 새벽 2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찬성 294, 반대 62, 기권 6표였다. 분단 45년 만에 무혈혁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동독 마지막 총리 드메지어는 1990102일 통일 전야제에서 이별은 주로 슬픔이지만 오늘 우리의 동독과의 영원한 이별은 기쁨이라며 통일의 감격을 전했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상임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했다.

 

V.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올 자요, 전능한 자로라 하시더라”(1:8)의 주관자다. 알파는 천지창조, 오메가는 예수님의 재림이다.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시간을 역사라고 한다. 이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다. 독일통일이 기적이라면 대한민국 현대사도 기적이다. 이 기적의 역사를 주관해온 분이 하나님이다.

전통적 유교의 나라에서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다. 지도자가 회개하고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지새던 아버지들이 변했다. 건국 당시 국민소득 60달러에 불과했던 우리 경제가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통일을 앞두고 기적의 두 기둥이 대립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다. 미래를 위해 한 발짝 내딛기가 버겁다. 정상회담을 대가로 45천말 달러의 대북불법송금이 일어나고 북한이 5차례 핵실험을 강행해도 대화와 협력을 주장하고 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중국을 방문해 사대외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통진당 해산, 전교조 불법화, 사드 배치, 개성공단 폐쇄를 선언하고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도발을 일삼는 김정은을 대항해 북한주민 환영, 김정은 레짐 체인지로 대응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사태로 탄핵 당했다.

이렇듯 대북 및 통일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사법당국이 종북 콘서트의 신은미를 추방했지만 한겨레는 신은미에게 통일문화상을 수여하는 기이한 나라가 되었다. 종북 콘서트의 황선의 남편 윤기진은 2012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을 향해 박근혜 때문에 죄송합니다. 박근혜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외쳐댔다.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수 십 개의 시민단체가 이름만 바꿔 활동하고 있는 비정상의 나라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열린 통준위 회의에는 평화통일을 위해 친미와 종북이 화해해야 한다는 발언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미국과 북한이 동격이다.

대한민국에 기적의 현대사를 만들어준 주관자의 손길이 절실하다. 우리 힘으로 통일을 이루기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는다.

 

VI.

<대한민국의 사명>

모든 피조물은 창조된 목적이 있다. 컵은 물을 따라 마시기 위해, 의자는 착석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만약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을 상실하면 폐기 처분되기 마련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창조되었을까? 이 질문에 성실히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인생은 망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창조 목적은 무엇일까?

20019.11테러에 대한 선교사적 정의는 서구 문명국가가 주도해 온 선교사역이 종말을 고했다는 의미라는 이스라엘 선교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 향후 중동 및 구공산권 국가들을 위한 선교의 바통을 이어받을 나라는 어디일까.

100년 전 평양 대부흥을 경험했던 선교사들이 평양=동방의 예루살렘, 조선=동방의 이스라엘로 불렀다. 이런 사실이 예언처럼 다가온다. 예루살렘은 복음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즉 서방의 예루살렘이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에 복음을 전파했다면 이제 동방의 예루살렘이 나설 차례다. 선교의 불모지, 구 공산권과 중동지역에 대한 선교가 남아 있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창조의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한반도 통일에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다면 우리의 자세는 진지해져야 한다. 자신감을 갖고 통일에 임해야 마땅하다. 통일은 영토의 확장이나 통일 대박의 차원을 초월한다. 24백만 북한 주민을 구원하고 세계 선교사역의 2단계 기틀을 마련하는 일인 셈이다. 이 사역에 우리 민족이 사용된다니 축복이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독일통일을 재음미 해보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3개월 전에 빌리 브란트 사민당 총재가 방한했다. 기자들이 독일 통일은 언제나 가능할까요?”라고 물었다. 브란트는 내 생전에 어려울 것입니다. 통일이 되어도 한반도 통일이 된 후에나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실제 동서독은 분단된 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 같았다. 상호 방문과 교류가 활발했고 우리와 같은 무력적 도발과 충돌도 없었다.

하지만 그 후 3개월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년 여 만에 통일이 이루어졌다. 통일 후 독일은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해 동독 재건에 나섰다. 많은 시행착오를 범했지만 통일 25년 만에 유럽 최강의 나라로 우뚝 섰다. 2016년 독일의 GDPEU 전체 GDP40%를 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EU를 선두에서 리드하는 국가로 거듭났다.

 

VII.

<통일 매뉴얼 코리아 카탈로그’>

2013428, 독일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 디차이트(Die Zeit)북한 재건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북한 재건에 대한 경제학 교수 울리히 블룸의 제언을 소개한 것이었다. 요약하면 독일은 통일의 전례가 없어 많은 시행착오를 범했으며 천문학적 통일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한국은 이런 시행착오를 잘 분석해 대비하면 독일 보다 쉽게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블룸은 이른 바 코리아 카탈로그를 제시했다. 독일 통일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 교훈, 시행착오 및 경험을 통해 우리가 참고해야 할 여러 정책적 대안이었다. 1. 재산권 반환이 아닌 보상을 원칙으로 할 것, 2.인프라 촉진법을 가동할 것, 3.북한 기술자 보호 및 활용, 4.공장건설 등 직접투자에 중점을 둘 것, 5.인민군 조직을 활용할 것 등이다.

이 대안은 독일이 범했던 시행착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우선 독일은 통일 후 동독 내 재산을 원소유주에게 반환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왜냐하면 통일 전 서독으로 이주한 400만에 달하는 동독인들의 재산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이 동독 재건에 장애가 되었다.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았고 기업은 재산권 반환 소송에 휘말렸다.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들의 재산은 동독 정부에 귀속되었고 합법적인 상거래에 따라 주민에게 양도되었다. 통일 후 서독주민이 된 동독인이 동독에 남겨두고 온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고 많은 혼란과 분쟁이 이어졌다. 한국은 후발주자로서 이런 문제점을 보완해 보상의 기준을 잘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북한 재건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투자자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전 세계 투자자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특히 핵, 항공 우주, 군사, 자원 분야의 기술자를 보호하고 이들을 위한 R&D 센터를 구축해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토록 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 동독지역은 서독 작업장의 연장이나 공장 생산라인의 연장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동독인을 이등국민으로 차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북한에 직접투자를 유도하는 것도 안정된 고용을 확대해 경제적 안정을 기여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상거래와 서비스로는 남한 이주를 막기도 버겁다. 또한 150만 인민군 조직을 해체하기보다 북한 재건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다.

1991년부터 북한을 연구해온 오스트리아 비인 대학 프랑크 박사도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유리하다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사회보장 시스템,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함께 유리한 중국 변수라고 한다. 독일 통일 당시 소련은 지는 해에 불과했다. 경기는 침체하고 연방은 해체 위기에 있었다. 거대한 소련 시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비록 경제성장의 동력이 한계에 부딪혀 있기는 해도 경제적 영향력은 여전하다. 특히 북한 기업에게 중국 시장은 사막의 오아시스다. 중국과의 경협이나 무역, 상거래를 통해 시장경제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있다.

이런 학자들의 주장을 보며 통일의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제 통일의 부작용을 거론하기보다 희망을 이야기할 시점이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독일이 통일 후 더 강한 나라가 되었듯이 한반도 통일도 번영을 약속하고 있다.

 

VIII.

<분단국의 운명>

건전한 사회는 보수와 진보, 양날개로 날아야 한다.” 옳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분단된 나라에게는 이다. 진보와 종북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말은 종북세력의 방패막이요 온상이다. 통진당은 민주당을 숙주로 정치권에 입성했다. 통진당원이 더불어민주당의 도움으로 20대 국회에 무소속으로 진출한 것도 사실이다.

서독과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국이었다.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동독이나 월맹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독일은 서독의 주도 하에 자유민주통일을 이뤘고 베트남은 적화통일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분단국 베트남의 민주주의가 헌법을 수호할 의지와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서독의 차이다.

베트남의 여린 민주주의는 헌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킬 만한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독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헌재와 헌법수호청이 나섰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74년 서독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평화무드에 빠져 있었다. 안보는 뒷전이었고 접근을 통한 변화가 대동독정책의 주류였다. 이런 가운데 헌법수호청과 검찰은 총리실에서 암약하던 귄터 기욤을 체포했다. 브란트는 안보 무능을 인정하며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49년 독일 분단 직후 서독, 극우 및 극좌파 정당이 출범하며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특히 1949102일 창당한 사회주의제국당(SRP)은 네오나치를 표방하며 나치의 영광을 재연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제국당은 나치당원들을 영입하며 당시 자민당 당원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4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기도 했다. 히틀러 정권 때 청소년기를 겪었던 자들이었다.

제국당의 불법은 헌법수호청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연방헌재는 1952년 사회주의제국당을 해산시켰다. 마찬가지로 헌법재판소는 1956년 독일공산당(KPD)에게 위헌 판결을 내리고 정당해산을 명령했다. 헌재는 2016년 이 시점에도 독일민족민주당(NPD)에 대해 위헌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 이러니 비록 좌파당이라는 정당이 등장해도 초법적, 반헌법적 활동을 절대로 하지 못한다.

서독은 통일 전 동독과 6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1, 2차 정상회담은 1970년 브란트 총리 하에서 동독 에어푸르트와 서독 카셀에서 열렸다. 3차 정상회담은 슈미트 총리가 동베를린을 방문해 호네커 총서기를 만났고 4차 정상회담은 호네커가 본을 방문해 콜 총리와 개최한 회담이었다.

1~4차까지의 회담은 예외 없이 분단 이슈가 의제가 되었다. 국경지대에 설치한 기관단총 철거, 양독 시민들의 상호 방문 확대, 베를린-서독 간 동행협정, 노약자 및 만성질환자의 서독 이주, 정치범 석방, 재야인사들의 서독 이주, 청소년 상호 교류 및 방문, 저널리스트 상호국 주재, 방송 교류 등과 같은 이슈들이 합의되었다.

5차 회담은 19891219일 동독 급변사태 직후 콜 총리가 드레스덴을 방문하며 이뤄졌다. 당시 호네커가 당에서 축출되고 후임 크렌츠에 의해 임용된 모드로프 총리의 제안으로 드레스덴 연설 직후 성사되었다. 이 회담은 최초로 의제 속에 통일 문제가 포함된 회담이었다. 그리고 6차 회담은 동독 내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드메지어 총리와의 회담으로 그야말로 통일협상이었다.

우리의 1, 2차 정상회담이 통일을 의제로 다루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 ‘NLL’ 등 초헌법적 사안을 논의했던 것과 대비된다.


IX.

<에곤 바(Egon Bahr)의 추종자>

에곤 바는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핵심 브레인이다. 그는 동서독 이질적 체제 간 기능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전략가이다. 에곤 바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rung)를 모토로 내걸고 동독과의 관계 개선과 교류 협력을 강화해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했다. 동독의 호응도 대단했다.

하지만 헌법수호청이 고정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던 귄터 기욤을 체포했다. 국민은 안보에 무능한 브란트 정권을 거부하게 되었고 결국 브란트는 1974년 총리직을 사퇴해야 했다. 에곤 바의 설계 도면에는 없었던 일이다.

브란트의 후임에 같은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선출되었다. 1974년 선거에서 득표율 2위를 차지했던 사민당(SPD)1위인 기민련(CDU)을 제치고 제3당이었던 자민당(FDP)과 연정에 성공해 총리에 올랐다. 슈미트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이어갔지만 1978년 소련이 동독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자 미국의 핵미사일 퍼싱 II를 서독에 배치하는 공세를 펼쳤다.

당시 유럽에는 평화운동이 대세였으며 서독에도 30만 명의 평화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에곤 바는 슈미트가 동독을 협박하는 전쟁 상황을 조장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9517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도 슈미트의 결정은 왜곡된 사고의 상징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에곤 바의 실체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드러났다. 빌리 브란트는 장벽이 붕괴되던 날 발터 몸퍼(Walter Momper) 베를린 시장의 전화를 받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에곤 바는 언론의 질문에 당일 브란트와 동행했다고 답변을 했지만 거짓이었다.

독일의 주요 일간지 디 벨트가 2014에곤 바는 장벽 붕괴 직후 어디에 있었나?”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에곤 바가 1989년 인터뷰에서 브란트와 함께 베를린행 비행 중이었다고 답변했던 사실이 거짓말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브란트와 동행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실렸다. 에곤 바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브란트를 배신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민당 내 극좌파인 오스카 라퐁텐 편에 붙어 통일에 반기를 들었다.

몸퍼의 전화를 받은 브란트는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하며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Jetzt wa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ort”(함께 태어난 것이 이제 함께 자라게 되었다)라는 명언은 그 때 남긴 것이다.

김영희 중앙일보 기자는 에곤 바의 열렬한 추종자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했을 때도 핵동결과 평화협정의 교환이 해답이라고 썼던 인물이다. 김 기자는 그의 책 <베를린 장벽의 서사>에서 에곤 바의 이런 행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언어 장벽 때문에 관련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거나 그의 성향으로 보아 이런 자료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책에는 에곤 바의 동방정책을 맹신하는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19대 국회 외통위 위원장을 지낸 나경원 의원도 에곤 바의 열렬한 팬이다. 나 의원은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며 2015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과 5.24 조치를 뛰어넘는 전면적인 경제협력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과연 이들이 에곤 바의 이런 행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런 발언을 했는지 의아하다. 그리고 5차 핵실험과 다종의 미사일을 발사하며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지금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에곤 바야말로 머리로는 통일을 원했지만 가슴으로는 동독에 깊은 애정을 갖은 인물이다.

대한민국은 분단국이다. 주요 이슈들이 북한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헌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회복하는 일이 그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X.

<북한은 제로베이스가 낫다>

요즘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통일이 대박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거의 습관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북한은 현재 상태로의 통일이 훨씬 유리하다. 아니 오히려 북한은 제로베이스가 낫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통일과 관련해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경제적 교류와 협력은 늘려 북한경제를 성장의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통일해야 비용이 적게 든다는 주장에 익숙하다. 한번 보면 당연한 주장이지만 다시 보면 허점투성이다. 우선 이런 기능주의적 주장은 북한의 실체를 애써 외면한다. 북한도 통일을 원하며 통일비용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이 원하는 통일은 적화통일이며 이런 최고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의 희생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과거 햇볕주의자들이 10년 이상 공들였던 남북교류협력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의도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남북교류협력기금을 비롯한 여러 자금이 3대 세습을 공고히 하는데 사용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통합-통일의 기능주의적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반증한다. 대신 북한은 과거 갖지 못했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미사일 개발과 핵을 갖게 되었다.

북한재건은 통일 후에나 가능한 경제적 통합으로 민주적 정치질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확립된 후에나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민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습독재체제 하에서 가용재원은 늘 비경제적 분야로 흘러들기 마련이다. 기껏해야 주민들의 배급량을 늘리는 수준일 것이 자명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다수의 신도시를 개발해왔다. 강북이 아니라 허허벌판에 강남이 개발되고 분당, 일산, 상봉, 세종 신도시 모두 농지나 미개발 지역에 세워졌다. 왜 그럴까?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열심히 북한 주도의 재건사업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보자. 강북 땅에 도로 수리, 부동산 개보수 등에 투입될 것이며 이 일도 온갖 분쟁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통일 후 북한재건은 허허벌판인 땅에 최신 기술을 활용해 추진해야 한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의 폐허 더미에서 경제강국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더 이상 비용 운운하며 통일의 시기를 늦추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XI.

<통일준비?>

최근 우리나라 통일논의가 우스꽝스럽다. 북한에 대해 캄캄하고 무지하다. 그저 남북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가고 통일을 이루자는 식이다. 통일의 구호만 난무하며 통일의 가치에는 무관심하다. 이러니 우리 청소년들 대부분은 통일에 무감각하다. , 무엇 때문에 통일해야 하는지를 모르니 통일에 무관심하다. 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과 가치를 회복하는 것부터가 통일준비다.

미국은 이름도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는 나라, 코리아의 6.25 전쟁에 179만명을 파병해 5만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조국은, 알지도 못하고 만나본 적도 없는 나라와 백성을 지켜달라는 조국의 부름에 응답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자유,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20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쳤고 국가는 이런 청년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격려하고 있다. 자유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니 미국이 강한 나라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통일은 억압과 빈곤으로 신음하고 있는 24백만 동포를 해방하는 일이다. 자유와 복음을 접하는 기회만으로도 통일은 감당할 만한 일이다. 남북대화론자, 평화통일론자들의 주장에는 이런 가치들이 들어있지 않다. 여야 대화는커녕, 여여 및 야야도 대화를 못해 당이 쪼개지는 정치권인데 3대 세습독재자, 무자비한 김정은과 대화로 통일을 이루자고 하니 한심하다.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망자가 다스리는 나라다. 북한정권은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회개의 대상이요, 전도의 대상이다. 2인자 고모부를 시신조차 찾을수 없도록 공중분해 사형시키는 망나니 김정은과 대화로 평화통일을 이룬다니....

화해와 소통의 대상은 북한 주민이다.

 

XII.

<통일비용>

통일비용이 남북대화를 통한 점진적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이유다. 궤변이다. 북한의 지하자원의 가치는 7000~1경이다. 우리나라 총자산이 11000조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지하자원만으로도 통일비용을 조달할 수 있다.

또한 통일비용은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나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할 것이라는 말 속에 해답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북한에 법과 제도의 정비, 사회적 인프라 구축해 해외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싶은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동강 기적을 통해 북한을 경제적으로 성장시켜 통일을 해야 비용이 적게 든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있다. 참으로 우습다. 핵과 미사일만으로도 남한은 물론 전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인 데 경제적 성공마저 거머쥔다면 적화통일은 시간문제다.

지금도 종북이니, 남남갈등이니로 북한에 급변사태가 일어나도 우리의 자중지란으로 우리가 원하는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 우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적되고 있는데도 이런 황당한 주장이 여과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독일과 달리 우리나라는 통일이라는 구호만 요란하다. 분단 동안 서독이 400만명의 동독 탈출자를 수용했다. 우리는 현재 탈북민 28천명 정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착과정에 문제가 적지 않다. 최근 독일의 여러 일간지에서 탈북자를 제대로 수용하고 정착시키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꼬집는 기사를 다루고 있다. 통일대박을 부르짖으며 북한을 탈출해 유리 방황하는 북한동포도 관리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이러고도 국제사회에 통일을 외치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다.

 

XIII.

<좌파적 전쟁관 및 대북관>

"어떤 (나쁜) 평화도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 "북한은 핵을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 좌파 정치인들의 전쟁관이요, 대북관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인식이기도 하다.

대통령, 국회의장, 야당 국회의원들의 이런 인식을 확인한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마음껏 핵실험을 자행했다. 천안함을 공격해 46명의 해군을 수장시켰는데 무사했다. 대낮에 연평도를 포격해 4명을 살해했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 남한에는 평화주의자들이 득실거린다. 평화 코스프레가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미국 차례다. 김정일이 핵보유국을 선언한 데 이어 김정은이 ICBM(대류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다. 미국을 손보겠다는 신호다. 속셈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라는 메시지다.

이런 도발에 트럼프의 대응은 남다르다.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며 전략적 이내의 끝을 선언했다. 마지노선을 넘으면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경고다.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동맹인 남한마저 소 닭쳐다 보듯 한다. 트럼프를 밀어주지는 못할지언정, 우리는 전쟁을 싫어한다는 반응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이라도 하면 '반전운동'이라도 펼칠 기세다.

동맹이 무엇인가? 동맹국이 싸우면 함께 싸워주는 것. "야단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딱 지금 상황이다. 제발 시누이의 평화 코스프레를 걷어치워라! 차라리 한미동맹을 깨라. 김정은이 쳐들어오면 굴복하면 평화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 사회의 의식수준인지 걱정이다. 아니면 이런 좌경화된 정치인들의 거짓 평화운동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화해해야할 대상은 김정은이 아니라, 북한주민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4:18). 21세기 북한주민의 삶이다.

 

XIV.

<독일통일의 시사점>

통일은 히말라야 정상을 등반하는 것과 같다. 등반 여정이 험하고 난관이 많다. 지금까지 독일팀, 예멘팀, 베트남팀이 이 등반에 도전했다. 예멘과 베트남 팀은 실패했고 독일팀이 정상에 올랐다. 독일 팀은 등반하며 큰 피해를 당했다. 크레바스에 추락해 사람들이 죽기도 했고 눈 폭풍에 갇혀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눈사태로 대원이 실종되고 돌풍이 불어 등산장비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등반팀이 히말라야 처녀봉에 오를 차례다. 독일 팀의 많은 사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독일 루트는 피하라고 아우성이다. 다른 루트를 찾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루트는 안전한가? 아니다. 크레바스가 더 많을 수도 있다. 눈사태가 빈번한 곳은 어딘지, 돌풍이 어디에서 몰아치는지, 사전 정보가 없다.

독일 팀의 루트를 따라가야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크레바스 위치, 눈사태와 돌풍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독일 팀의 < 헬무트 콜> 팀장은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하고 과거에 이 정상을 정복했던 팀이 한 팀이라도 있었다면 많은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을 텐데,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했다. 그가 통일 총리 헬무트 콜이다. 최장수 총리다. 통일 전 8, 통일 후 8, 16년 동안 독일호를 이끈 인물이다.“ - 박상봉의 통일 패러다임의 전환과 북한재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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