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컬럼 및 논단

급변-통일-통합

박상봉 박사 2015. 4. 20. 13:10

급변-통일-통합

 

“통일은 대박” 발언 이후 통일을 주제로 한 행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후속조치를 보면 박대통령의 진의를 왜곡하는 발언들이 야당은 물론 여당 쪽에서 흘러나온다. 유감이다. 통일 대박이 거론된 배경에는 비효율적 북한 독재체제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어떻게 이 체제를 재건해 통일한국을 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 라는 간절함이 묻어있다. 통일은 이루었으나 북한재건에 실패한다면 또 다시 반세기 이상 빈곤과 갈등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한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 적화통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헌법 4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이루어 경제부흥의 토대를 확실히 지켜내는 것이다.

통일대박 발언 이후에 후속 발언들에는 이런 긴박함이 없다. 그저 통일지상주의에 취해있다. 요즘 항간에는 「Red Korea」라는 단어가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북한 주도의 통일한국을 칭하는 단어로 우리 사회 통진당은 물론 민주당, 심지어 새누리 당에도 Red Korea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 그렇다. 우리 안보가 얼마나 취약한 지는 현직 국회의원들이 RO와 같은 혁명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버젓이 우리사회 리더를 자칭하고 있는 사람(교수, 연예인, 국회의원, 정치인 등)들이 천안함 폭침을 왜곡하고 있어도 이렇다할 대안이 없다. 장성택을 무참히 처형하고 수많은 탈북여성이 인신매매의 고통을 당해도 북한인권법은 외면받는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비정치적 분야부터 작은 통일을 이루고 큰 통일로 나아가야 통일이 대박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주장이 궤변인 것은 여기에는 적화통일에 대한 경계심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김정은을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통일에 일정한 지분을 줄 심사다. 예멘 통일에서 배워야 한다. 김정은이 남북대화에 나서는 이유가 뭘까?. 김정은이 3차에 걸친 핵실험을 하고 이제 4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남북대화에서는 미국을 배제하자고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한편, 다른 외교 채널에서는 통미봉남 전략을 추구하는 이유는 뭘까? 적화통일이다. 왜냐하면 21세기 글로벌 대명천지 시대에 통일 이외에 김정은의 북한이 생존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아마도 베트남 통일을 모델로 그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장성택 처형에서도 보듯이 북한은 절대독재권력를 해칠 어떤 세력도 용납할 수 없는 체제다. 이런 체제가 스스로 개혁과 개방을 선택하기 어렵다. 즉 북한은 강요된 개혁 개방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강요된 개혁 개방을 통해 독재체제를 와해시켜야 한다. 우리나라 좌파 지식인들은 민주화 세력임을 강조하면서도 북한 김정은 독재는 건드릴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서독의 통일총리 콜이 동독을 향해 통일협상을 하려면 민주적 절차에 따른 지도자를 선출하라고 요구했고 동독은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 왜 북한은 김정은이 유일한 협상 파트너이어야 하는지 반문해야 한다. 박근혜 독재를 외치며 정권 퇴진을 부르짖는 진보세력들이 왜 북한 김정은 세습독재는 영원히 인정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통일이 대박이 되려면 김정은을 통일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통일을 대박으로 이끌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김정일 김정은과 같은 독재권력이 권좌에 있는 한 남북 간 어떠한 작은 통합도 불가하다. 이것이 지난 10년 햇볕정책의 교훈이다.

 

I. 급변에서 통일

1. 과도단계의 설정과 목표

과도단계는 ‘급변-통일-통합’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단계마다 문제점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정한다. 과도단계는 2단계로 급변사태에서 통일까지를 1단계, 통일 후부터 통합까지를 2단계로 정한다.

1단계의 목표는 급변사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데 있다. 남북통일은 대한민국 헌법 3조와 4조에 의거해 한반도에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다. 이 과정은 기대 이상의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과도단계를 설정해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평화롭고 효율적인 통일을 이루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

1단계는 두 가지 사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첫째, 무분별한 남북한 주민들의 이주를 통제하는 것과 둘째, 북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남한의 개인이나 이익단체들의 무분별한 활동도 제한될 수 있다.

이미 동독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만성적인 결핍과 억압 체제에서 살아온 북한 주민들은 기회가 있다면 보다 나은 체제로의 이주를 시도할 것이다. 남한의 풍요로움과 동경심이 발동해 북한 주민을 무작정 남한 행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이 현상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통일은 혼돈과 불확실성의 연속이 될 것이고 북한주민에 대한 남한의 적대현상이 극대화할 것이다.

다른 한편 남한주민들의 무분별한 대북진출의 행동들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업자들의 방북은 절대 금물이다. 남한 사회를 부동산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80, 90년대의 복부인들로 몸살을 알았던 과거의 교훈이다. 대북투자는 투기성이 아니라 진정 북한 재건에 걸맞다고 판단되는 투자로 제한해야 한다.

제2과도단계의 목표는 통일 후 통합과정을 효율적으로 추진해 빠른 시일 내에 남과 북이 완전한 제도적 통합을 완성하는 데 있다. 통합과정에 있어서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남한 주민과 이익단체들이 사적 이익이나 집단 이기주의를 위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전교조나 민주노총과 같은 이익단체가 아직 시장경제의 발판도 마련되지 않은 북한에 상주하며 근로자들을 부추겨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부터 부추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과도한 사회보장제도를 경계하고 생산성 향상의 한도 내에서 복지를 확대하는 방안을 정착시켜야 한다. 과도 2단계에서는 이런 유혹이나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재산권 문제와 관련해 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2. 급변-통합-통일 구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한 후 종편 JTBC가 특별대담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정세현 원광대 총장과 문정인 연세대 교수를 초청해 대박 통일을 진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일 및 북한 전문가로 알려진 위 두 사람은 햇볕정책의 전도사들이다. 정세현 총장은 통일이 대박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호전되어야 하며 그 바탕 위에 평화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다면 통일은 쪽박이라는 것이었고 문정인 교수도 맞장구를 쳤다.

전성훈 통일연구원장은 “통일은 준비해야 온다. 그 준비가 바로 남북한 통합이다”라고 했다. 위 두 사람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정세현, 문정인은 김대중 및 노무현 정권에서 햇볕정책을 이론과 실무에서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에 반해 전성훈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인수위원으로 2013년 8월 통일연구원장에 임용되었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그룹의 통일구상이 동일하다. 즉 급변-통합-통일 구상이다. 여기에는 햇볕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온 기능주의가 배후에 있다. 기능주의나 신기능주의는 남과 북이 갈등의 소지가 큰 정치적 부분을 유보한 채 문화, 경제, 기술 등 정치적 요소가 배제된 부분을 먼저 통합한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작은 통일로부터 큰 통일을 이루어간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론적 배경에 따라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경제교류협력을 강화해 나가며 통합을 확대해 궁극적인 통일을 완성한다는 구상이다.

우리에게 기능주의적 접근방법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다음 두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방법론이 무리가 없고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두 나라가 통합이 가능한 분야부터 통합을 시작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야 말로 이상적이다. 둘째, 전쟁과 같은 물리적 충돌과 대립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남북통일을 위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허구에 불과하다. 사기꾼의 말은 현란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물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방법을 설명한다고 하자. “왼발을 내딛고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내딛고,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다시 왼발을 내딛으면 물을 걸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론적으로 그럴 듯 해보이지만 현실은 불가능하다. 남과 북이 통일을 주제로 기능주의적 접근을 한다는 것은 마치 이런 궤변과 유사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작은 통일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결과는 더 강력한 고립주의요, 핵과 미사일 개발이었다.

기능주의 접근방법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통합을 원하는 남과 북이 동일한 국가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EU)이 경제통합에 이어 정치적 통합을 추진할 수 있는 것도 회원국이 모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라고 하는 동일한 국가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 3대 세습독재체제다. 김정은의 말이 헌법 위에 존재하는 이상한 나라다. 이런 나라와 기능주의적 접근을 한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요 말의 유희다.

 

3. 실패한 기능주의적 통일, 예멘

기능주의적 접근방법에 따라 통일을 이룬 나라가 남북 예멘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던 북예멘과 사회주의 국가였던 남예멘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루어냈다. 인구와 경제력에서 우위를 점유했던 북예멘이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남예멘에게 나머지 지분을 할애했다. 이에 따라 5인의 대통령 평의회로 구성된 과도정부에는 5명 중 3명은 북예멘, 2명은 남예멘 출신이 참여했다. 대통령은 북예멘, 부통령은 남예멘에서 맡았다. 39명의 내각 중 20명이 북예멘 출신이었다. 통일의회는 인구비례에 따라 북예멘 출신 159명, 남예멘 출신 111명으로 구성되었다. 즉 북예멘이 통일과도정부를 주도하되 남예멘도 무시못할 견제세력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3년간의 과도정부가 끝나고 1993년 총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결과 남예멘 사회당은 3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남예멘 정치지도자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하지만 남예멘의 반발은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살레 대통령이 이끄는 북예멘이 승리하게 되었다. 남예멘 사회당은 제거되고 북예멘 주도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예멘 통일이 실패한 이유는 첫째 남북 간 대등한 기계적인 통합에서 찾아야 한다. 유지호 전 예멘대사는 “남북 수뇌부는 두 정부 간 기계적인 병합을 일단 이루어 놓기만 하면 통합과정은 무난히 진행될 것으로 믿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계적인 통합으로 정부는 비대화되었고 남북 간 관료들의 협조도 어려웠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나라 동등한 지분으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민족이라는 우산 아래 체제와 이념이 수용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은 허구였다. 통일과 나아가 통합 과정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한 체제 속으로 비효율적 체제가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김정은에게 통일한국의 권력의 50%를 허락한다면 성공적인 통일이 절대 불가할 것이다. 즉 통일은 성공한 체제, 효율적인 이념이 주도해야 하고 실패한 체제의 정치인들은 통일의 지분을 포기함으로 그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북한의 전자회사가 합병을 하기로 하자. 합병해 두 회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전자회사가 삼성전자로 편입되어야 한다. 반대로 두 회사가 공동지분을 주장한다면 합병된 회사는 성공할 확률이 급감하게 될 것이다.

최근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다시 한번 흡수통일 불가를 주장했다. 과거 김대중 정부 흡수통일 불가론의 재탕이다. 김정은 세습독재가 등장하고 핵을 개발하고 장성택을 무참히 처형하는 등 북한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 데도 변한 게 없다. 통일을 담보로 오기를 부리고 있다. 거듭 되풀이 하지만 상이한 이념과 체제의 두 나라가 기능주의적 통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설사 통일이 된다해도 불행이다. 이것이 예멘은 물론 독일 통일의 교훈이다.

 

4. 동독은 기능주의로 인해 붕괴

예멘의 기능주의적 통일이 실패로 끝난 것과 마찬가지로 서독의 초기 기능주의적 접근은 기대와 달리 동독 공산정권을 붕괴시켰다. 독일의 경우 경제적 격차가 큰 상이한 체제 사이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상대적 약자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교훈이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신동방정책을 시작으로 대동독 정책의 기조는 「Wandel durch Annaehrung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동서독 교류가 활성화되었고 동독 외딴섬 베를린을 왕래하는 구간에는 차량이 넘쳤다. 청소년, 문화, 스포츠 교류가 활발했고 동서독 간 방송협약으로 TV 시청도 가능했다. 심지어 동독인 대다수가 서독 TV의 8시 뉴스를 가장 신뢰한다고 밝힐 정도였다.

분단 시절 서독와 베를린을 잇는 구간은 모두 3곳이었다. 베를린-함부르크, 베를린-하노버, 베를린-뉘른베르그 구간이었다. 이 구간에는 인터숍이라는 편의점과 식당 등 휴게소가 있었다. 많은 서독인들이 이곳에 들러 편의용품이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아무런 제약없이 자연스럽게 동서독 주민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론 슈타지 요원의 감시가 늘 따랐지만 인적교류가 다양하게 일어났던 현장이다. 물론 동독 상품의 질이 낙후해 서독주민이 즐겨 찾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은 동독 가격을 서독 마르크화로 결제할 수 있었다. 당시 마르크의 가치는 서독이 동독의 4배 이상이었다. 동독을 찾는 서독인은 의무적으로 20마르크를 1:1로 교환해야 했다.

서독-베를린 구간은 서독사회의 풍요로움을 잘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포르쉐, 메르세데스, BMW, 아우디는 물론 푸죠, 클라이슬러, 혼다, 도요타 등 세계적인 메이커의 최신 걸작들이 즐비했다. 트라반트, 바르투부르그 등 동독 자동차와 라다, 스코다 등 동구권 자동차들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호화로웠다. 시속 80km를 힘겹게 달리는 트라반트 옆으로 서독 고급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청소년들의 교류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동서독 방송이 자유롭게 교환되었고 동독인들은 서독 TV 저녁 8시 뉴스를 통해 세상소식을 접했다.

이렇듯 동서독 간 청소년, 문화, 방송 등 비정치적 교류가 지속적으로 늘어났지만 어떤 작은 통합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작은 통일에서 큰 통일이라는 구호도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교류와 협력이 늘어날수록 양독 간 괴리는 더욱 커졌다. 동독주민은 서독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로움을 동경했고 서독주민은 동독 사회의 부조리를 눈으로 확인했다.

이렇듯 동서독이 경제, 문화, 스포츠, 방송 등 비정치적 교류 협력을 통해 정치적 협력으로 확대한다는 기능주의적 접근은 결국 허사였다. 비정치적 교류가 늘어도 동독의 정치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주변국에 개혁의 물결이 동독으로 흐르지는 못했다. 결국 동독인이 변화를 선택해야 했고 동독 공산정권이 막을 내렸다. 작은 통합에서 큰 통합으로 나아가 통일을 이룬다는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말해주는 사례다.

 

5. 북한 민주정권 수립

장성택 처형 후 북한 급변사태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제 그 상황이 올 것이냐의 문제이지 급변사태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 즉 내일 당장 북한 급변사태가 생긴다면 어떻게 대응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최고 권력자의 통일철학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다. 1950년 6․25전쟁은 김일성의 불장난이었고 결과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2014년 분단 61년째다. 환갑이라는 나이 동안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 이산가족의 고통은 차라리 낫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인신매매로 짐승같은 삶을 이어가는 탈북여성들의 탄식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꽃제비는 북한의 거지를 말한다.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꽃제비가 연길 공항, 시장 등 천지다. 탈북자는 중국은 물론 영국, 독일, 덴마크,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 캐나다, 미국 등에도 산재해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런 분단의 고통을 해결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정신이다. 일부 정치인이나 여론이 탈북자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통일에 반대하는 것과는 별개다. 여론은 둘째 문제다. 안보를 여론에 맡길 수 없듯이 통일도 마찬가지다.

동독의 급변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최대 교훈은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의 통일리더십이다. 콜의 통일철학은 확고했다. 분단국의 최고 권력자의 최고 가치는 분단 극복이다. 통일이다. 여론은 통일을 두고 찬반으로 갈릴 수 있으나 최고 권력자는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1년차를 맞아 “통일은 대박”으로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혔다. 과거 정권에서 금기시했던 통일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 나름의 통일철학이 있다는 반증이다. 북한의 비위를 맞추며 비밀리에 정상회담을 하고 돈을 대고 남북관계를 구걸했던 과거 정권과 다르다.

둘째, 북한 내 민주정권을 창출하는 일이다.

동독 급변사태를 통일로 이끌기 콜 총리는 동독에 민주적 협상 파트너를 세우는 일이었다. 호네커는 물론이고 모드로브도 통일 협상의 파트너는 아니었다. 콜은 공산정권과의 통일협상은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우리나라 햇볕론자들이 한결같이 김정은을 통일 협상의 파트너로 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월요데모로 표출된 시민의 힘에 굴복한 동독 공산당은 호네커 서기장을 출당시키고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를 내각 총리로 선임했다. 작센 주 공산당 책임자였던 모드로브는 동독 개혁 공산주의자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던 인물이다. 급변의 시기에 내각의 수장이 된 모드로브는 콜 총리에게 팔을 내밀었다. 금기시 됐던 통일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의와 함께 긴급자금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한 콜 총리의 대답은 10개항 프로그램이었다. 10개항 프로그램의 핵심은 동독 민주정권 수립이었다. 동독 지원을 포함한 통일 협상은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라야 가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북한 급변사태와 함께 설정되는 제1과도단계의 최종목표는 북한 내 민주정권의 수립이다.

6. 동독 자유선거와 통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는 1990년 3월 18일에 있었다. 선거결과 동독 기민당 등 반공산 정당들이 압도적으로 승리해 반공 변호사였던 로타 드메지어(Lothar de Maizier)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자유선거 결과는 신속한 통일을 바라는 주민의 염원을 그대로 반영했다. 서독연방으로의 편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독일연합(Allianz fuer Deutschland)이 뚜렷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단순히 정치적 개혁을 바랐던 지식인들의 동독 지키기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드메지어 총리는 새 내각을 구성하고 통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 첫 관문이 경제, 화폐, 사회 통합이었고 동독은 1990년 7월 1일을 기해 서독의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콜과 드메지어 사이의 통일협상도 속도를 냈다. 협상과정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동독 공산지도부가 집단적으로 통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동독 공산당으로 하여금 호네커 총서기를 축출하도록 유도한 것이나 동독 지도부에 대한 책임소재를 동독법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결정은 이런 고심의 결과이었다. 이에 따라 통일 후 법적 책임을 져야 했던 동독 지도부는 호네커 총서기와 슈타지 총책이었던 밀케와 방아쇠를 당긴 국경수비대원에 국한했다. 혐의는 동독 탈출자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고 실제 발포한 것이었다.

남북 통일과정에서 북한 엘리트들의 반발은 자칫 평화적 통일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통일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어떤 정치적 보복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과거 정권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심판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해 어떤 기준을 정할지 결정해야 한다.

동서독 간 통일협상은 이런 것들을 감안해 추진되었고 동독 인민회의는 1990년 8월 23일 임시회의를 열어 1990년 10월 3일을 기해 서독 기본법(헌법)의 효력범위로 편입할 것을 결의했다.

이렇듯 동독 급변사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평화적 통일을 완성하는데 최대 공로자는 헬무트 콜이다. 콜 총리는 동독 내부문제에 직접 개입한다는 인상을 배제했다. 동독 혼란기에 결성된 시민단체들에게 정치개혁을 주도하도록 했으며 동독 공산당도 일정한 발언권을 허락했다. 결국 성공적인 통일은 급변사태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북한에 효율적인 체제를 심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7. 콜 총리 통일외교, 소련

동독의 사태를 추적하며 통일의 자신감을 얻은 콜 총리는 대소외교에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도 독미공조를 바탕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콜 총리는 물론 겐셔 외무장관은 수시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과 독일 문제를 협의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가운데 콜(Helmut Kohl) 총리는 90년 7월 16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코카서스 정상회담에서 통일을 향한 가장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코카서스 지방 쉐제스노보드스크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는 겐셔(Genscher) 외무장관과 바이겔(Waigel) 재무장관이 동참했다. 소련의 개혁정책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통일 이후 소련군 철수 및 연방군의 국방문제에 관한 8개항에 대해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요 합의사항은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시한을 4년 내로 명시함으로써 소련군 철수의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한 것이고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4개 연합국의 지위를 상실함과 동시에 독일은 완전 주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군 철수와 관련해서는 서독은 모든 철수비용 일체를 지불함과 동시에 철수하는 소련군을 위한 소련 내 주둔시설을 마련해주기로 하는 등 합의에 대한 서독정부의 대(對) 소련 재정지원이 약속되었다. 또한 합의사항에는 통일된 이후 독일의 병력 규모를 37만 명으로 제한한다는 내용과 통일 연방군은 대량살상무기인 ABC 무기 즉 핵, 화학, 생물무기의 제조는 물론이고 보유 처리 등 일체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로 인해 독일은 통일 후 주변국에 대한 위협을 배제하고 평화에 기여하는 조치를 제도적으로 갖추며 통일로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음은 8개항의 합의사항이었다.

물론 영국의 대처 총리와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독소 합의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독일의 주권회복과 통일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고 소련이 동의한 합의사항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8. 콜-고르바초프 8개항 합의사항

콜과 고르바초프의 코카서스 정상회담은 소련의 이해와 독일의 이해가 절묘하게 조화된 결실을 이끌어냈다. 정상회담은 8개항의 합의사항을 체결하고 종결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 개방을 위한 강력한 지원군을 얻게 되었고 독일은 통일의 실질적 열쇠를 쥐고 있던 소련을 지원군으로 얻었다. 8개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독일통일은 서독, 동독 그리고 베를린 시를 대상으로 한다. 2.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전승국의 권리와 책임은 완전 소멸된다. 독일은 통일 시점을 기해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 3. 통일된 독일은 국가의 무제한적 주권을 행사하며 동맹 가담과 관련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 선언은 유럽안보협력협의회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서독정부는 통일된 독일이 북대서양동맹(NATO)에 잔류하기 원하며 동독정부도 이에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 4. 통일된 독일은 소련 정부와 소련군의 동독철수에 관해 조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동독 주둔 소련군은 3년 - 4년 과도기 내에 철수한다. 또한 독․소 양국은 동독에 서독 마르크화 도입을 위한 과도기 조약을 체결한다. 5. 소련군이 동독 영토에 잔류하고 있는 한 나토 동맹의 동독 확대는 불가하다. 이에 따라 나토 조약 제5조와 6조(나토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정하고 공동의 대응조치를 취한다는 조항)은 불변한다. 서독 연방군(Bundesarmee)은 통일과 동시에 동독과 베를린에 주둔한다. 6. 동독 영토에 소련군이 잔류하는 한 미영불 3개 연합군은 통일 후라도 서베를린에 주둔한다. 서독 정부는 연합국에 이를 요청하고 각국 정부와 관련 조약을 체결한다. 7. 서독 정부는 진행 중인 빈(Wien) 회담(당시 독일문제에 대한 국제회의)에서 통일된 독일의 군대를 3- 4년 내에 37만 명으로 감축한다는 의무사항을 공표한다. 군대 감축은 빈 협정의 발효와 함께 실행에 들어간다. 8. 통일된 독일은 핵, 화학, 생물무기 제조, 보유 및 처리를 포기하고 비확산 조약(NPT) 회원국으로 남는다.

독일은 통일을 쟁취한 대가로 주변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항을 두었다. 이 외에도 독일은 폴란드와의 국경인 오더(Oder) 나이스(Neiss) 국경을 문제시 삼지 않을 것도 공개적으로 확인해주었다. 이런 서독 콜 총리의 성실한 노력에 고르바초프는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고르바초프는 「고르비」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독일인이 좋아하는 최고의 인물로 남아있다. 고르비의 부인 라이샤 여사가 암으로 투병할 때는 서독으로 초대해 최상의 치료로 돌봐주기도 했다.

 

9. 중국의 개입 차단

북한 대량탈북과 급변사태와 관련해 우리가 최우선 과제는 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통일의 기회로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 목표가 없는 북한 안정화 정책은 허구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통일의 목표가 국민들은 차치하더라도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존재하고 있는지 여부다. 독일통일이 위대한 것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통일을 성사시킨 것이고 통일 후유증과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독일이 정치적, 경제적 강국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북한에 대해 언론은 물론 많은 전문가들도 급변사태를 예견해 왔다. 이로 인해 급변사태에 대비한 안정화 정책이나 방안에 대한 연구가 끊이지 않았지만 급변사태를 통일의 기회로 인식하고 구체적인 통일정책을 마련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국이 변수다. 중국이 반대하는 통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즉 중국을 설득해 한반도 통일에 동의하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행히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 및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 주도의 통일에 두 나라가 원칙적으로 동의했다”고 밝힌바 있다. 하지만 안심할 일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느냐에 따라 입장이 바뀔 개연성은 언제나 상존하기 때문이다. 즉 보다 면밀하게 원칙적 동의가 유효할 수 있는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북한 급변사태와 관련해 중국의 최대 관심은 탈북자 러시와 동북아 정세 불안이다. 북한 급변사태 시 이런 중국의 고충을 해결하는 것이 통일정책이 되어야 한다. 서독이 대(對) 소련외교를 통일정책의 핵심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대(對) 중국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탈북자 문제 해결의 자신감을 보이고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향해 탈북자 전원수용 방침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탈북자 정책은 소극적 수용이었다.

정부의 무책임한 탈북자 정책은 중국의 불신을 낳고 있다. 라오스에서 추방된 7명의 탈북청년이 북송된 사건은 우리 탈북자 정책의 진면목이다. 헝가리 정부와 협상을 벌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토록 했던 서독의 신뢰 및 책임외교가 부럽다. 정부의 확고한 통일철학과 신념이 절실하다.

탈북자 문제 이외에 또 하나 중국의 걱정거리는 급변사태 발발 시 동북아 안보불안이다. 중국의 한 내부 비밀문서 따르면 북한 골수분자 대략 15만여명이 백두산을 근거지로 결사항전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중국에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15만명이 아니라 100만명의 군부가 집단으로 저항해도 수 일 내에 해결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미국의 북한 진출을 우려하는 중국의 불안에도 미리미리 대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통일이 되면 미군은 절대로 북한에 주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동독 급변사태 때 서독과 소련이 코카서스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참조해 통일한국이 군사강국이 될 것이라는 이미지를 차단하자.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인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는 “중국 내에는 한반도 통일이 미군의 압록강 진출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통일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G2(주요2개국)로 불리는 중·미 관계가 협력이 아닌 대결로 나아갈 때 미국이 통일된 한반도를 대중국 포위전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면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주는 의미가 부정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는 “한반도 분단 현실은 강대국들에게 개입할 빌미와 틈새를 제공한다”며 “한반도 통일은 이러한 빌미와 틈새를 메우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과 관련해 미국 랜드 연구소의 베넷 박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이다. 베넷은 대(對) 중국외교를 강화하되 해야 하지만 중국은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북한 급변사태 때 유엔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우리나라에 불리한 선택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과거 북핵 문제가 유엔 안보리에 상정되었을 때 중국은 국제사회와 달리 북한 편을 들은 바 있다.

우리의 대(對) 중국외교는 이중전략이 유효하다. 우선 중국이 한반도 통일에 반대하고 북한 급변사태 시 개입해 친중국 공산정권을 수립한다면 강력히 대항한다는 전략이다. 현재 중국은 56개 소수민족 문제로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개국과는 분쟁을 겪고 있다. 특히 티베트와 신장 위그르 지역은 반중 독립 움직임이 거세다. 승려의 분신이 이어지고 있고 중국 공안과 무력 충돌이 잦아지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거나 북한에 친중정권을 세우려 할 경우 이를 절대 방관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어 살았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프랑스 기소르망 박사는 “한국이 중국에 대담한 목소리를 내라”고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중국이 한국 주도의 통일에 동의한다면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 3성은 동북아 경제의 허브로 일시에 도약할 수 있다. 통일 후 북한재건에서 발생하게될 특수효과는 20년 이상 이어질 것이고 이 시기 중국이 가장 큰 혜택을 볼 것은 자명하다. 세계적인 골칫거리인 북핵 문제도 해결될 뿐 아니라 탈북자로 인한 동북아 불안정도 해소된다. 그리고 통일된 한국은 동북아의 피스메이커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독일의 경우 동독재건과정에서 2조 유로가 투입되었다. 재건과정의 북한 특수가 중국 동북3성을 경제 허브로 거듭나게 하는 발판이 될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10. 시진핑은 제2의 고르바초프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중국을 방문했다. 시진핑 주석은 박대통령을 최고로 예우하며 양국 간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통일에 대해 깊숙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월 6일 있었던 신년기자 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한국 주도의 통일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한때 시진핑 주석은 6․25 전쟁에 중공군이 참여한 사건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세워 한국인의 지탄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 골칫거리 북한을 언제까지 두둔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최근 장성택의 처형으로 북중관계가 미궁에 빠졌다. 중국의 대북 비즈니스는 급락하고 김정은의 행보는 예측 불가다. 무엇보다 김정은은 장성택 처형 후 민심이반을 추스르고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4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에 대한 후견인 노릇도 어렵다. 어차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정권이 존재하는 한 북한의 변화는 매우 제한적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좌에 오른 김정은이 주체사상을 포기할 수 없으며 폭정이 계속될 것이다. 중국이 이런 북한을 껴안고 얻을 이익이 무엇일까?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면 중국도 결국 대한민국을 선택할 것이다. 어차피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낙오한 북한이 남한의 체제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면 사전에 동의해 주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생색나는 일이다.

1989년 동독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르바초프가 서독의 손을 들어주어 주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면 제2의 고르바초프 시진핑의 탄생도 시간문제다. 물론 우리의 대중외교에는 강력한 한미동맹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고 동북아 평화와 안정이 정착될 때까지 포기할 수 없다. 한미동맹이 없는 전략은 외교든 국방이든 이빨빠진 호랑이에 불과할 것이다.

 

11. 탈출자에 대한 전원 수용 방침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흩어진 탈북자를 전원 수용할 것을 천명해야 한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에 따르면 2013년말 현재 난민 지위를 얻어 제3국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1천여명에 이른다. 영국 603명, 독일 193명, 네덜란드 36명, 캐나다 64명, 미국 167명 등이다. 난민 지위를 기다리는 탈북자도 500여명에 육박한다. 난민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에는 대략 15만명이 은닉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탈북자들은 대한민국이 타국에 자국민을 위탁하는 행위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자국민 보호를 소홀히한 증거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이어 이명박 정부에서도 탈북자 보호는 「조용한 외교」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실제 중국은 탈북자를 한쪽 눈을 감고 지켜보고 있으니 탈북자 문제를 공론화하지 말 것을 종용해왔다. 국내 유관 단체도 이런 중국에 논리에 동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조용한 외교는 공직자들의 직무유기에 불과하다.

과거 서독은 조건없이 동독 탈출자를 받아들였다. 특히 동독 정부가 꺼리는 환자나 노약자들을 받았다. 이렇게 서독이 수용한 동독인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해체될 때까지 350만여명에 이른다. 동독 탈출자는 베를린 장벽을 전후해 양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1948년부터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축되기 전까지 13년 동안 매년 평균 2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1989년까지 27년 동안 매년 평균 2만명이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이주했다.

이렇듯 대규모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몰려들어도 동요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이런 서독의 책임있는 자세에 감동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서독이 동독 탈출자들을 제3국에 방치했다면 통일은 불가능했을 가능성도 크다. 독일통일은 동독발 문제군을 서독이 해결한다는 책임감과 자신감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거듭된 얘기지만 김정은 정권은 앞날이 불투명하다. 내일이라도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이 급변사태를 우리가 주도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탈북자는 대한민국이 책임진다”고 세계 만방에 외쳐야 한다.

 

12. 헝가리의 반란/ 중국의 반란

1989년 여름 본격적인 동독 엑서더스가 시작됐다. 라이프치히 월요데모가 반복되면서 집단적 탈출이 본격화됐다. 8월 8일 동베를린 서독 대표부에는 131명의 동독인이 들이닥쳤다. 이어서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서독 대사관에 동독인이 몰려들었다. 대사관 뜰은 탈출자를 수용할 텐트가 빼곡히 들어섰다. 여름 어느 날 600여명의 동독 청년이 헝가리를 경유해 오스트리아로 몰려들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있었던 평화축제 행사에 참가했던 동독 청년들이 탈출한 것이었다. 이 행사는 범유럽 유니온과 헝가리 인권단체가 주관한 것으로 600여명의 동독 청년이 참가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동독 청년들은 모두 서독 행을 요구했다.

콜 총리는 즉시 디드리히 겐셔(Diedrich Genscher) 외무장관을 파견해 헝가리 정부와 담판을 벌여 전원을 서독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동독 정권도 긴급히 움직였다. 동독 외교부는 헝가리와 사회주의 형제국임을 강조하며 오스트리아 국경을 폐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개방하면 전통적인 우방국 외교관계도 단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서독 사이에 21세기 최대의 외교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이 외교전쟁은 서독의 승리로 끝났다. 헝가리 네메츠 정부가 서독의 요구에 따라 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키로 결정했던 것이다. 1989년 8월 19일이었다. 이 일은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개방 한 달만에 동독인 2만4천여명이 이 루트로 서독 땅을 밟았다. 당시 헝가리의 국경개방은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외무상 기율라 호른(Horn)은 독일 통일 후 슈피겔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어려웠던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Freiheit, die ich meine 내가 생각하는 자유"에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키로 한 역사적 결단의 순간이 잘 기록되어 있다.

체코 프라하와 폴란드 바르샤바 서독 대사관에 진입한 동독인들도 무사히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제3국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인이 무려 350만명에 달했다. 탈출자를 막고자 했던 베를린 장벽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고 1989년 11월 9일 28년간 동과 서를 가르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헝가리의 반란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을 떠나는 순간 헌법 상 대한민국 국민이다.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헌법도 준수하지 못하고 국가나 통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 또한 2천4백만 인구의 북한과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나라가 수십만 탈북자를 돌보지 못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들이 한국의 정책에 신뢰를 보내기가 어렵다. 우리가 탈북자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보일 때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 크게 깊어질 것이다. 중국에 대한 우리의 비판도 그럴 때 보다 떳떳할 것이며 중국의 반란도 그때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13. 랜드연구소의 보고서

미국의 랜드 연구소 브루스 베넷(Bruce Bennett) 박사는 2013년 9월 19일 'Preparing for Possibility of North Korean Collaps 북한정권 붕괴 가능성에 대한 대비'라는 보고서에서 북한 정권이 붕괴한다면 한미 양국은 중국의 개입을 요청하고 제2의 휴전선을 설치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이 5~6개의 공수사단 등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면 중국의 개입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중국의 개입은 뻔한 일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2020년이 되면 한국 병력이 크게 감축될 것이고 중국의 개입의지도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소는 나아가 "한미 양국은 북한 정권 붕괴시 탈북자 이탈을 막거나 중국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이 없다"는 전제 하에 중국의 개입을 막지 못할 바에야 "한미 양국이 먼저 중국에 평화적인 개입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한미 양국이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중국과 분리선을 만들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한미-중국 간 분리선으로 ▲현재 북중간 국경선 남쪽 50km ▲평양 북쪽 라인 ▲평양-원산 라인 등 3개 모델을 제시했다.

러시아 일간지 로시이스카야 가제타는 이런 랜드 연구소의 보고서를 인용해 한·미·중 3국이 예상 시나리오를 만들어 책임 구역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세계일보는 이 신문이 「새로운 38선」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전하고 있다. 세계일보는 또한 홍콩 명보를 인용해 “북한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면 한국이 끌어안 자료 : 세계일보 2013.9.23

 

을 힘이 없어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중국이 주도면밀한 대책을 세워 북한 핵무기 유실을 마고 난민 발생을 막아야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대한민국이 한심하다. 또 다시 미국과 중국이 우리를 어떻게 나눌까 머리를 맞대는 모습이다.

반면에 청샤오허 중국 인민대 국제정치학과 교수 등 여러 학자들은 통일한국이 중국의 국가이익에 반하지 않는다면 한국 주도의 독일식 통일도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국책연구소인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의 바실리 미헤예프 부소장도 “북한의 경제·정치 체제는 역사적으로 운이 다했다”며 “현실성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한국의 통일 방안은 남한의 시장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통일 뿐”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는 특히 “현재의 북한 지도부는 긍정적 변화를 이행할 수는 없지만, 불법적인 자본축적을 해 온 온 일부 북한 수뇌부는 부(富)의 합법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을 보며 통일을 우리가 주도하지 않는다면 기대와 전혀 다른 통일이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고언이 진정 문장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주문한다. 적어도 대한민국 대통령은 확고한 통일철학을 지니고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우리가 바라는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 주도의 통일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시킬 대안들을 서둘러 마련해 통일외교에 적극 임해야 한다.

 

14. 북한 4차 핵실험

최근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외신보도가 들린다. 북한의 추가 핵실험은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필요한 수순으로 보인다. 4차 핵실험은 미사일에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소량화, 경량화를 완성하는 단계가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언제든지 단거리 미사일에 실어 남한을 공격할 수 있는 핵무기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4차 핵실험은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핵을 보유한 북한이 또 다시 천안함과 같은 폭침을 감행해도 전면전을 불사하는 대응을 하기가 어렵다. 연평도 폭침을 재연해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 핵전쟁을 우려하는 중국과 미국이 대응공격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지난 연평도 도발 때 강력히 대응하려 했지만 미국이 이를 반대했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당할 수밖에 없다. 종북세력들이 활개를 쳐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북한의 협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겁쟁이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다. 일부는 해외로 탈출할 것이고 다수의 보수는 침묵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은 선전포고다. 전쟁 아니면 평화다. 선제공격을 통해 핵실험 근원지를 해체시키든지, 미군 전술핵을 재배치하든지, 우리도 자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 이런 각오없이 국가와 영토를 지킬 수 없고 국민을 보호할 수 없다. 4차 핵실험은 「Red Korea」와 「Blue Korea」를 가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15. 북핵 위기와 식자우환(識字憂患)

2013년 2월 12일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이 보유한 미사일 기술과 함께 한반도 안보는 새 국면을 맞았다. 대한민국 안보의 근간이었던 한미동맹의 핵우산이 ‘찢어진 우산’이라는 우려와 함께 국군의 날 위용을 자랑하던 첨단 군사무기가 왠지 미덥지 않았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알래스카에 레이더기지를 신설하고 서부해안에 14기의 요격미사일을 추가 배치하였다. 북한의 위협이 리얼임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당시 안보전문가들은 우리사회는 불과 수십 km 위에 핵을 이고 있어도 태평한 안보불감증을 걱정했다.

물론 안보불감증으로 북한의 남한 흔들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득도 있지만 이런 핵위기 상황에서 식자들의 우환이 가관이었다. 당시 식자우환(識字憂患)은 두 가지 형태를 보였다. 자칭 평화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 극에 달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현대사를 친일과 반일 세력의 대결로 이분화해 갈등을 부추겼다.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의 경제강국을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친일 반일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자체가 북한식이었다. 당시 ‘백년전쟁’은 조회수 200만을 돌파했다. 더욱이 사진을 조작해 한국 현대사에 시동을 건 건국 이승만 대통령을 불륜을 저지른 인사쯤으로 만드는 일은 역사적 범죄도 저질렀다.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장병이 대한민국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되돌아보면 대한민국을 부정적 역사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북한의 현대사를 미화한다. 내재적 접근법은 이런 부류들의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명박 정부를 거치고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며 이런 부류들의 처세도 놀랍게 변한다. 교수, 언론인 등 식자들이 만들어내는 논리와 주장이 그럴싸하지만 결국 북한에 이롭다. 이들 식자들은 과거 북한 핵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거나 북은 절대 핵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인사들이다. 이제는 남한의 자위적 핵무장론이나 전술핵 재배치는 어불성설이라고 난리다. 한미동맹이 있으며 미국과 국제사회가 반대하니 할 수 없다는 등 논리도 다양하다. 식자우환(識字憂患), 알아서 탈이다.

안보가 먼저다. 20대 김정은의 핵 전쟁놀음이 어떻게 이어질지 걱정이다. 이런 마당에 자칭 평화주의자들의 처세가 역겹다. 주먹다짐을 하다 상대방이 총을 들었다. 나도 총을 들어 대응하든지, 무릎 꿇고 굴복하든지 양자택일이다. 내가 총을 들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그럴듯한 논리로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안보위기가 사라진단 말인가. 전쟁은 힘의 균형이 막는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 핵개발이 이루어진 과정이다.

한국 현대사가 민족의 비극으로 얼룩진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조작해 비극의 역사를 더욱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배신이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기적의 현대사’를 만든 세계사의 위기이기도 하다.

북한은 두 가지 무기를 갖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핵무기와 심리전 무기이다. 후자는 파악하기 어렵다. 종북세력은 분명하니 차라리 낫다. 오늘날 그럴싸한 주장으로 사태를 호도하는 식자들이 문제다.

 

핵무장론의 핵심은 북핵 폐기이다. 중국 카드를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중국은 무엇보다 일본의 핵무장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일본은 30톤 이상의 플루토늅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핵무기 수천발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재료가 완비됐다는 견해다. 우리의 핵무장론은 일본의 핵무장을 불러올 것이며 이 시나리오를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애매모호하게 일관하던 중국이 앞장서 북핵 폐기에 나설 것이다. 어차피 핵무장이 불가하다면 북핵을 폐기토록 하는 것이 정답이다.

 

 

 

II. 통일에서 통합

1. 제2의 과도단계

북한 급변사태와 함께 설정했던 과도단계는 북한에 민주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민주적 절차를 거치며 탄생한 정부가 실질적으로 북한주민을 대변하고 서독과의 통일협상의 파트너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제1의 과도단계라고 한다면 통일 후 제2과도단계 설정이 필요하다. 제2과도단계의 목표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체제와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흔히 통합로부터 통일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통일 전 통합은 허구에 불과하다. 과거 햇볕정책을 근간으로 추진했던 각종 경제교류는 어떤 통합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 독재정권이 핵무기나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독재정권을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통일을 전제로한 통합을 만들어간다는 주장은 허구이며 비효율적이다. 분단시절 서독이 동독에 지원했던 프로그램들은 통합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

 

2.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세계사를 둘러보면 과거 강대국이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약소국이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 세계 문명을 일으킨 이집트 문명의 위대함은 보이지 않는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위상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과 일본은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 경제는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패배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비참하게 패배한 이 두 나라가 살아남을 수조차 있을 것인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은 경제의 기적을 일으키며 멀쩡하게 재기해 세계 2, 3위의 대국으로 성장했다.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은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단순한 경제적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또는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는 국가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이익단체의 성격과 단체 상호관계를 들었다. 민주주의 하에서 이익집단은 자유롭게 생기게 마련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강력한 이익집단으로 성장해 경제의 원활한 순환을 저해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여러 이익집단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 공기업이 「신의 직장」으로 불리며 경제의 선순환을 막고 있고 노조, 전문직 단체, 사용자 단체 등의 집단이기주의나 정치적 개입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철도노조의 불법파업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데 이어 의사들의 집단행동도 보도되고 있다. 민주사회가 장기간 유지되며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정치인은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 판이다.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 총리, 불법파업에 맞섰던 레이건 대통령의 결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과 일본의 재기는 납득할 만하다. 두 나라는 전쟁을 통해 「과거에 대한 진정한 파괴」가 가능했다. 나라는 파괴되었지만 동시에 비효율적인 이익단체나 집단도 사라졌다. 낙후한 공장, 시설과 건물도 모두 파괴됐다. 독일 일본 두 나라는 이 자리에 최첨단기술을 도입해 공장, 시설, 건물, 철도 등 최신기술에 기반한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낙후한 시설, 인프라는 이미 파괴되었고 사사건건 시비할 주민, 노동자, 노조, 사회단체, 환경단체와 같은 이익집단도 없었다. 소위 전쟁의 비극의 이면에 건설적 파괴가 일어나 재기가 가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의 경제수준을 어느 정도 이룬 후 통일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낙후한 후진국형 경제에 돈을 들여 리모델링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갑절의 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어차피 부수고 다시 세워야 할 것들이다. 신도시 건설은 낙후한 지역이 아니라 논이나 방치된 땅에 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제로 베이스에서 통일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그냥 그 자리에 최첨단 기술을 적용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공장, 시설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30차 고속도로 건설도 문제없다. 북한 경제수준을 올린다는 얘기는 통일 후 낙후한 공장, 도로, 시설, 장비 등 경제환경을 보수하자는 의미다.

 

3. 통일 매뉴얼 ‘코리아 카탈로그’

1989년 봄, 서독 내독성(통일부에 해당)에 한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밤베르그(Bamberg) 대학 경제학과 울리히 블룸(Ulrich Blum) 교수의 편지로 “통일에 대비하고 있느냐?”를 묻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1월 “통일대비 프로그램이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블룸은 동독 붕괴를 예언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고 통일 후 동독 재건과정에 참여했다. 동독 드레스덴 대학과 할레 대학에 통일과 동독 재건을 주제로 한 강의를 개설했고 작센 주 비덴코프(Biedenkopf) 총리 자문역과 통일 연구소를 이끌었다.

블룸 교수가 4월말 대한민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국 정부는 통일에 대비해야 하며 독일통일의 경험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정은의 도를 넘는 폭정이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과 어울려 블룸의 주문이 마치 예언처럼 다가오고 있다.

그는 이미 수차례 방한해 통일부 자문, 각종 세미나와 특강을 해왔다. 독일의 유력한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는 2013년 4월 28일 블룸의 ‘Aufbau Fernost 북한 재건’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이 글에는 독일통일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 교훈, 시행착오 및 경험 뿐 아니라 통일을 대비해야할 우리 정부가 취해야할 「코리아 카탈로그」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 재산권 반환이 아닌 보상을 원칙으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독일은 통일 후 동독 재산을 원소유주에게 반환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 원칙이 투자자들의 발목을 잡았고 기업은 재산권 반환 소송에 휘말렸다. 서독은 분단기간 350만명 이상의 동독인을 수용했다. 서독에 정착한 동독인들의 동독 재산은 동독 정부에 귀속되었고 합법적으로 동독주민에게 양도되었다. 통일 후 서독인이 된 동독주민이 동독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기대 밖의 혼란과 분쟁이 이어졌다.

1989년 신포럼(Neues Forum)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동독 급변사태를 이끌었던 데들레프 달크(Detlef Dalk)는 통일 후 주택을 잃게 되자 콜 총리에게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주택이 원 소유자가 재산권 반환 청구소송으로 빼앗기게 되었다. 달크 의원의 지역에는 이렇게 재산권 분쟁에 시달린 건물 및 토지가 70%나 달했다. 동독 투자를 계획하던 기업은 뜻하지 않은 재산권 분쟁이 제기되며 투자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의 경우는 적어도 이런 실수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재산권 반환은 사유재산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 하에서 당연한 권리이지만 통일이라는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에 권리를 유보하는 방안을 적절히 마련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경우 재산권을 입증할 만한 신뢰있는 자료들이 대부분 유실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인프라 촉진법을 주문하고 있다.

동독은 만성적인 재정적 결핍으로 산업 인프라가 낙후되어 있었다. 도로, 철도는 물론 통신시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북한의 상황은 동독보다 열악할 것이다. 북한으로 이전된는 재원들이 투자에 집중될 수 있도록 제대로 관리해야 하며 특히 산업 기반이 될 시설을 갖추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셋째, 북한 기술자 보호 및 활용이다.

독일통일 초기 좌편향 정치인과 언론은 동독주민의 이등국민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이 자리에 「머릿 속 장벽(Mauer im Kopf)」이 드러섰다는 조소섞인 비아냥이 화두였다. 사유화 추진과정에서 우월한 베시(Wessis)들이 오시(Ossis)들을 해고하고 불이익을 준다는 팽배하기도 했다.

물론 재건과정에서 구조조정과 합리적 재편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지만 가능한 북한 주민을 배려한 정책들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동독주민들에게 향후 일정과 성과를 잘 설명해 주어 불필요한 오해를 막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 기술인력은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미사일, 핵 등 북한의 앞선 군사기술은 활용가치가 매우 클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연구 산업단지를 세우는 일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넷째, 건설, 토목, 공장, 설비 등 직접투자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통일 후 정치적 포퓰리즘을 경계한다 해도 대량의 재원이 북한주민의 생계를 위해 투입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대책을 강구해 재원을 투자에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투자는 고용을 창출할 뿐 아니라 미래 이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동독 기업들이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못하고 서독 공장의 연장에 불과했다는 비판도 우리에게 북한 투자와 관련해 교훈을 주고 있다.

다섯째, 인민군 조직을 활용해야 한다.

북한 인민군은 150만 병력으로 단순히 해체하기에 아깝다. 북한 재건에 이 막강한 조직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곰곰이 연구해 볼 것을 조언하고 있다.

블룸은 우리 사회 희박한 통일의식에 대해서도 정치권의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서독인의 가슴에 통일의 피가 끓어오르게 한 것은 헬무트 콜 총리였다. 콜 총리는 “우리가 돈 때문에 통일을 거부한다면 역사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총리직을 걸만한 모험이었지만 통일을 향한 콜의 집념은 강했다. 최근 여러 전문가들이 갑작스런 북한 붕괴를 말하고 있다. 통일 리더십, 어떠한 암초를 만나더라도 통일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미래지향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블룸은 ‘코리아 카탈로그’의 존재만으로도 한국은 독일 보다 유리하다는 것이다. 독일의 시행착오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1991년부터 북한을 연구해온 오스트리아 비인 대학 뤼디거 프랑크(Ruediger Frank) 박사도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유리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한 사회보장 시스템이 오히려 북한 재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그의 아이디어다.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함께 중국 변수도 통일에 유리하다고 말하는 프랑크는 독일 통일 당시 소련은 지는 해에 불과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경기는 침체하고 연방은 해체 위기에 있었다. 거대한 소련 시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뜨는 별이다. 8%대 고성장이 지속되며 북한 기업에게 중국 시장은 사막의 오아시스다. 북한이 중국과 체결한 많은 조인트 벤추어로부터 북한 경영자들은 시장경제에 대해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다.

블룸과 프랑크의 이런 주장들이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에 자신감을 주고 있다. 어차피 극복해야할 분단이다. 피할 수 없을 바에야 즐기라는 말이 있다. 통일의 부작용을 들추기보다 희망을 이야기할 시점이다. 독일이 많은 문제를 극복하고 통일 후 더 강한 나라가 된 것처럼 한반도의 통일도 축복이 될 것이라는 블룸 교수의 예언에 박수를 보낸다.

코리아 카탈로그는 통일 후 남과 북의 통합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통합의 주체가 대한민국이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내용들이다. 김정은이 주도하는 통합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주문들이다. 통합은 이렇듯 통일 후에나 비로소 가능하다.

 

4. 정치적 포퓰리즘

독일은 정책의 실패로 과다한 통일비용을 지불했다. 그 이면에는 기적과 같은 통일로 충격에 휩싸인 서독 정치인들이 있다. 패전으로 분단을 당연히 수용해야 했던 독일이 꿈에나 가능했던 통일을 얻었다. 서독 정치인들은 통일을 가져다 준 동독동포에게 감격했다. 콜 총리는 목숨을 건 투쟁으로 공산정권을 몰락시킨 동독인에게 빚진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콜 총리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동독인들에게 통일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었고 중요한 경제정책에 정치적 요소를 앞세웠다. 대표적인 정책이 화폐통합이었다. 물론 통일 초기 동독인들을 위한 정치적 배려가 당연했다지만 보다 세심한 정책이 필요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특성상 단기에 폐지하기 어렵다. 즉 통일 후에도 정책들이 오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야당이 정부 여당을 공격할 수 있는 단골 메뉴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예에서도 23년 동안 꾸준히 이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동독 임금, 실업률, 생활수준, GDP, 기술수준 등은 늘 정치적 논란거리였다. 야당은 선거철마다 끊임없이 「동독 향수 Ost Nostalgie」를 꺼내 동독주민의 불만을 이슈를 만들어 정부 여당을 공격해왔다. 현재 좌파당(Die Linke)가 자민당(FDP)나 녹색당(Die Gruene)를 제치고 동독지역에서 기민련(CDU), 사민당(SPD)와 함께 제3당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도 이런 정치적 포퓰리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좌파당은 통일 후 사민당 내 극좌 정치인 오스카 라퐁테인과 동독 공산당 사통당(SED)의 후신인 민사당(PDS)와 연합해 만든 정당이다. 초기 미약했던 지지도가 동서 격차가 좁혀지기 않으며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럴 때마다 「동독 향수」가 배경으로 작용했고 좌파당은 동독지역에 뿌리를 두고 확산일로에 있다. 물론 서독지역에서 좌파당의 지지도는 5% 미만으로 원내 진출도 어렵다. 즉 좌파당은 정치적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정당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어렵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통합과정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 우리 모두의 숙제다.

 

5. 부다페스트 토론회

2010년 통일 20주년을 맞아 부다페스트에서 독일통일 관련 국제행사가 열렸다. 헝가리 주재 독일 대사관, 사민당 재단인 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Friedrich-Ebert-Stiftung), 안드레시(Andrassy) 대학 공동 주최로 “통일 20주년 - 현상과 전망”이라는 주제의 국제 토론회가 개최된 것이다.

헝가리 주재 독일 대사 야네츠케-벤첼(Janetzke-Wenzel)은 인사말을 통해 행사의 목적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의 말을 인용해 “Ist wirklich zusammengewachsen, was zusammengehoert? 통일 후 동서독이 진정 나란히 성장했는가? 로 요약했다. 브란트는 신동방정책을 주도했으며 통일에 대한 감격을 ”Jetzt wae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oert! 이제 함께 태어난 것이 함께 자라게 되었구나!“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이 국제행사는 독일통일 20주년을 맞아 국내 정치상황은 물론 국제정치적으로 바라보는 통일을 주제로 설정했다. 독일통일에 대한 동유럽의 시각도 이런 차원에서 조명하며 특히 통일의 길을 열어젖힌 헝가리의 선구자적 역할을 재조명해 보았다.

독일의 내적 통합과 관련해서는 동독임금이 핵심주제가 되었다. 뮌헨 경제연구소(Institut fuer Wirtschaftsforschung in Muenchen)의 소장 한스-베르너 진(Hans-Werner Sinn) 교수는 발제를 통해 동독 지역의 GDP가 서독 지역에 비해 1/3 정도 낮은 것이 20년이 지나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통합 과정의 임금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동독임금을 과도하고 급격하게 서독과 맞추려고 했던 것이 실책이었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도 일인당GDP는 서독은 34,244 유로, 동독은 22,972 유로를 기록했다. 신자유주의자인 진 교수는 동독임금의 급상승으로 투자자들이 투자처를 동유럽 등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어 세계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입도 그만큼 늦어졌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작센-안할트(Sachsen-Anhalt) 주 재무장관인 칼-하인츠 파퀘(Karl-Heinz Paque) 교수는 만약에 임금정책이 없었다면 동독 전문인력의 서독 유출을 효과적으로 막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진 교수는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는 오히려 동독기업에 부족한 혁신능력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동독재건이 연구개발에 집중되어 동독기업이 독자적으로 경쟁력을 갖추도록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전문가의 주장은 통일 후 통합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논쟁거리였다. 정부 여당은 전자, 야당은 후자의 비판에 박수를 보내며 갈등을 보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논쟁과 분열이 좌파당의 출현을 초래했다. 좌파당은 헌법이 보장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다양한 사회주의적 요소를 통일된 독일에 심고자 힘을 모으고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동독인의 69%가 서독인을 거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수치는 통일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동독인 49%에 비해 상당히 높다. 따라서 동서독 통합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의 내면에는 아직도 이런 심리적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다른 한편 23년 간 지속되고 있는 이런 류의 논쟁에 대해 「이제 그만」이라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통합에 도움이 되기보다 갈등과 반목을 부추긴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6. 화폐통합

화폐통합은 성공적인 경제통합을 위한 기초 작업이다. 안정된 화폐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경제재건이 불가능하다. 물론 북한과 화폐통합은 남한으로서는 위기일 수도 있다. 급격한 통화량의 팽창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될 가능성이 크다. 원화를 손에 든 북한인들은 눌러왔던 소비욕구를 한꺼번에 분출할 충동을 느껴 생산이 동반되지 않은 소비만을 부추기는 부작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북 화폐통합은 어떤 목적 하에 추진되어야 할까? 우선 북한 경제재건의 토대가 될 금융제도를 정착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의 금융은 "화폐자원의 동원, 분배와 사용에서 형성되는 관계"로 정의되며 은행이 국가 재정을 공급한다. 비정부 경제주체 간 금융거래는 제한되며 기업소와 협동체는 정부가 제공한 자금으로 운영된다. 가계소득의 일부가 저축을 통해 기업투자로 연결되는 장치도 없다. 다만 부분적인 대부제도가 있어 국가은행이 기업소의 유동자금 부족분을 일시적으로 메워주는 정도다. 이런 사회주의 금융의 한계로 기업은 금융권을 통한 투자기금 조달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역신용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한다. 송금과 외환거래 등과 같은 은행의 금융서비스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업 정상화는 요원하다.

은행은 또한 기업소나 기관들에게 자금을 분배하며 생산주체들의 경제활동을 통제한다. 화폐의 기능과 관련해서도 북한당국은 가치척도, 가치보전, 지불수단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하나의 구호에 불과하다. 가격체계가 계획의 일부로 실제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 또한 사유재산제도를 금지하고 있어 화폐의 가치척도나 축적 기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북한의 공식환율은 달러 당 2.2원 이지만 비공식환율은 200원 수준으로 100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경제적 차원과 별개로 남북 화폐통합은 특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독재정권 하에서 기아와 궁핍에 시달려온 북한주민들에 대한 보상의 차원이다. 북한주민들에게 달러나 원화와 같은 경화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화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 화폐는 북한 원화에게는 없는 구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화폐통합에 있어 이런 정치적 의미가 중요한 것은 결국 통일의 가능성은 북한주민이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탈북자, 장마당 상인들에 의해 개혁 동기가 부여될 것이다. 또한 화폐통합은 좌절과 억압 속에 신음하던 북한주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시대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또한 통일된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완성되기 위해서 단일통화를 갖추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1871년 비스마르크 재상은 독일제국을 건설했지만 당시에 7개의 통화권과 33개의 민간발권은행이 난립하던 통화체계를 1873년 하나의 단일통화권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함으로 제국의 통일을 완성함과 동시에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반대로 독일은 2차 대전이 끝나자 분단과 함께 두 개의 화폐가 생겼다. 1948년 7월에 서독에 마르크화가 만들어지고 6주 후에는 동독에 화폐가 탄생한 것이다. 유럽연합이 정치적 통합까지 완전한 통합을 이루기 앞서 유러화를 도입해 전 회원국들을 하나의 통화권으로 묶은 것도 유럽의 통합을 가속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렇듯 화폐의 영향력은 단순한 경제적 차원을 넘어 정치 사회적으로 막강하다. 독일 역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서독 간에 다양한 통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양독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되기에 앞서 서둘러 추진했던 것이 동서독을 단일통화권으로 묶는 화폐통합이었다. 독일은 화폐통합을 조기에 실현시킴으로 통일이라고 하는 국가적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를 재확인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한다는 의도를 과시한 셈이다. 국제적 구매력을 확보한 서독의 마르크화가 동독인들에 손에 쥐어지자 이들은 서독의 풍요로움을 실감하게 되었고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보다는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7. 서독 마르크화를 달라

분단 40년 동안 동독인은 서독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동경해 왔다. 이들이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고 서독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Wenn die DM nicht zu uns kommt, kommen wir zur DM. 서독의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 마르크를 찾아 간다”. 실제로 1989년 늦여름부터 시작된 동독 탈출행렬은 50만명에 육박했다. 이런 대규모 탈출현상은 콜 총리에게 통일 후 첫 번째 도전이었다. 화폐통합은 이 첫 번째 도전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1990년 7월 1일 단행된 화폐통합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담고 있었다. △ 화폐통합으로 동독화폐는 폐지되고 서독 마르크화 통용된다. △ 동독 일상적 소득인 임금, 봉급, 장학금, 임대료, 연금 등은 1:1 환율을 적용해 서독화로 지급한다. △ 동독인 보유 현금과 예금재산은 2:1 환율을 적용한다. 단, 1인당 동독화폐 4천 마르크까지는 1:1의 환율을 적용한다. △ 화폐교환은 동독 금융기관 계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해외 거주자들의 재산은 특별 규정에 따른다.

당시 동서독 마르크화의 시장환율이 1:8인 상황 속에서 이런 무리한 화폐통합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정적이었다. 서독경제에 대한 부담도 컸지만 동독기업에 끼친 악영향은 예상 밖으로 컸다. 동독기업의 경쟁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통일 후 새로운 기업환경 속에서 많은 기업들이 생존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화폐통합에 대한 평가는 찬반으로 갈린다. 비판론자들은 화폐통합에 대한 경제적 의미에 치중한다. 화폐통합은 동독 화폐를 급격히 절상하는 효과를 가져와 기업의 줄도산으로 이어져 대량실업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찬성론자들은 정치적 의미를 도외시할 수 없었던 시대상황을 강조한다. 만약 이와 같은 화폐통합을 조기에 추진하지 않았다면 동독주민의 대량이주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동서독 화폐통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지대하다.

 

8. 북한 사유화와 투자

북한경제재건의 핵심은 중앙집권적 통제경제를 서둘러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토지, 건물은 물론이고 기업을 민간에 이양하는 사유화가 신속히 추진되어 시장경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동독에서 보듯이 사유화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많은 부작용과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기를 포기할 수 없다. 목적지가 분명한 데 장애물, 문제점, 부작용과 같은 구더기만 늘어놓을 수는 없다. 최선의 길은 가능한 한 갈등과 부작용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역사가 선사한 귀한 선물이다. 우리에 앞서 개척자의 길을 걸어가며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사유화는 투자가 핵심이다. 투자는 고용을 창출하고 산업화의 열쇠다. 사유화는 북한 전체 재산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부터 투자자를 확보하는 일이 관건이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자. 동독 사유화를 담당했던 트로이한트(Treuhandanstalt)의 전략적 공과 과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전통적인 우방국 투자유치.

북한기업의 사유화는 이미 거론한 바대로 북한에 시장경제를 구축하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이렇듯 통일한국을 새로 구축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전통 우방국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미국, 일본, 독일과 기타 유럽연합 등 남한과 전통적인 경제협력이 이어져 왔던 국가로부터 우선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사업계획과 투자유치전략 및 이에 대한 홍보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만약 이런 기본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전통적인 경제관계가 부재한 그 밖의 다른 나라로부터의 투자유치는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둘째, 중국의 신흥부호 및 북방권 투자자 유치

중국과 사회주의권의 투자도 겨냥할 만하다. 소련을 중심으로 동구권은 경제상호원조기구였던 코메콘(Comecon)을 중심으로 바터무역 등 경제협력을 추구해왔다. 1949년 소련이 주축이 되어 창설된 코메콘은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동독,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 이외에도 몽고, 쿠바, 베트남과 같은 비유럽 지역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두고 지난 40 여년간 상호간 보다 긴밀한 경제 협력과 공존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 왔다. 북한은 코메콘 비회원국이었으나 사회주의 동맹국으로서 상호원조와 경제협력을 통해 코메콘 국가들과 깊은 경제협력 관계 속에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값싼 에너지와 동독으로부터 다양한 생산기술을 도입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경제협력관계는 1990년대 개혁 개방이 본격화되며 급격히 와해되었다. 바터무역 비중이 급락했고 경화가 대금결제수단으로 도입되어 무역거래도 급감했다. 사회주의권이 세계 글로벌 시장에 편입되며 서방과의 경제교류는 급증하게 되었다. 쿠바가 금지했던 달러화의 국내유입을 허용했던 것도 이런 시대적 변화의 결과였다. 독일은 이런 경제지형의 변화를 적극 이용했다. 소련의 개혁과정에 600억 마르크를 지원했고 통일 후 편입된 동독 5개 주와 공산권과의 경제교류와 협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과거 공산권 국가들의 체제전환이 일단락되고 세계 글로벌 시장 참여도 본격적이다. 이들 국가들을 북한 경제재건이나 사유화 작업에 참여시킬 방안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독일 트로이한트는 동유럽 자문회사를 설립해 이를 활성화했다. 예를 들어 이 자문회사는 통일 3년차인 1993년 9월 러시아 공화국에 설치할 4개의 자유무역 지대에 속했던 칼리닌그라드에서 활동했던 120여개 기업에 대한 상세한 정보 및 투자관련법과 투자조건 등 각종 경제자료를 발간해 기업인들에게 배부한 바 있다. 물론 독일 기업의 소련 투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기업의 동독 투자를 겨냥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모스크바 소재의 소콜리니키는 동독 피르나 제지회사를 인수하였고 우화 소재의 바슈코르토스탄은 뤼츠겐도르프의 아디놀 석유회사를 인수한바 있다. 소련 가스회사나 섬유회사들도 동독 지역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트로이한트는 1994년 2월 모스크바 주재 괴테문화원에서 약 575개 소련 기업을 대상으로 동독 진출에 대한 각종 정보와 금융기관 활용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마찬가지로 통일 후 북한 경제재건과 사유화 과정에 북한 기업과 경제교류를 해왔던 중국을 비롯한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 동구권의 기업을 참여를 이끌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중국은 최근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신흥부호들이 대거 출현해 통일 이후 안정된 북한 투자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중국에 앞선 유통, 고급기술력의 상용화 및 해외마케팅 노하우를 이용해 중국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유화 작업의 성패는 가능한 한 많은 투자자들이 북한의 기업이나 토지, 경제입지로서의 북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의 사유화에 가능한 한 많은 투자를 전 세계로부터 유치할 수 있는 방안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북한경제 재건의 열쇠이자 남북경제통합의 성공을 가늠하는 일이기도 하다.

 

9. 동독 통신인프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서독 통일이 실현됨에 따라 동독지역에 대한 재건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우프바우 오스트(Aufbau Ost)’라고 하는 동독재건계획이 마련됐고 분야별로 다양한 재건사업들이 야심있게 추진됐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Telekom 2000 텔레콤 2000’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동독 통신망을 재건하는 사업으로 6년간 350억 마르크(약 20조원)을 투입해 초대현대식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 사업은 노후시설에 대한 현대화 작업과 통신회선에 대한 증설사업으로 분리 추진되었다.

통일 직후 서독은 사회주의 국가 중 가장 부유했던 동독의 통신수준이 얼마나 낙후했는지 놀랐다. 동독이 보유하고 있던 전화회선이 총 180만선에 불과했고 그나마 이 중 70만대는 산업용과 행정당국의 업무용에 할당된 형편이었다. 서독의 전화회선이 2,900만대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분단시절 동독의 통신사정의 정도를 가늠하게 된다. 사업장 전화도 서독의 경우 직장인 100명당 48대의 전화가 배당된 데 비해 동독은 19대에 불과했다. 또한 100가구당 전화대수도 서독의 경우 93대인데 비해 동독은 100가구당 16대였다. 주택용 전화의 종류도 단회선 이외에도 2인회선, 4인회선, 10인회선, 시간별회선 등을 활용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토록 했다. 동전용 공중전화도 불과 1만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통신활용도로 본 동독 주민들의 삶의 질은 매우 열악했다.

통신 기반시설들도 대부분이 1920~30년대에 만들어진 것들로 기초적인 통신수단용에 불과했다. 정보용 또는 경제활동용으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했다. 그리고 동서독 간의 전화통화는 국제전화로 취급되어 비싼 요금을 물어야 했고 동독의 혼란기에는 밀려드는 전화수요로 통신상 혼란과 두절상태가 생기기도 했다.

통신 인프라가 없이 투자자를 확보하기는 불가능했다. 초기 2, 3년간은 신설전화의 3분의 1을 기업체에 배당해주는 등 경제재건을 위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전화선을 증축하고 이동통신 및 인터넷 망의 구축도 ‘텔레콤 2000’ 구상 속에 착실히 추진되었다. 통일 전 동독에는 개인이 사적으로 전화를 신청할 경우 전화가 가설될 때까지 20년이나 긴 시간을 대기해야 할 정도로 기반시설의 수준이 미흡했으며 일반인들이 수동식으로 외부와의 전화를 사용할 경우에도 통화연결을 위한 대기시간이 3, 4시간이 되는 적도 다반사였다.

‘텔레콤 2000’ 사업은 이런 열악한 통신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조치였고 그로 인해 통신망은 초현대적 기반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동독의 전화상의 음질이 서독보다 훨씬 좋다고 말한다. 과거 “우리는 전화가 없어도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라고 자존심 반 부러움 반으로 굳이 전화의 필요성을 부인하던 동독인들이 이제는 최신의 통신설비로 서독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곳 보다 질 좋은 통신서비스를 향유하고 있다.

 

10. 북한은 제로베이스가 낫다

다수의 북한 전문가는 통일이 대박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거의 습관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북한은 현재 상태로의 통일이 훨씬 유리하다. 아니 오히려 북한은 제로베이스가 낫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통일과 관련해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경제적 교류와 협력은 늘려 북한경제를 성장의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통일해야 비용이 적게 든다”는 주장에 익숙하다. 한번 보면 당연한 주장이지만 다시 보면 허점투성이다. 우선 이런 기능주의적 주장은 북한의 실체를 애써 외면한다. 북한도 통일을 원하며 통일비용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이 원하는 통일은 적화통일이며 이런 최고의 가치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의 희생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과거 햇볕주의자들이 10년 이상 공들였던 남북교류협력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의도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남북교류협력기금을 비롯한 여러 자금이 3대 세습을 공고히 하는데 사용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통합-통일의 기능주의적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반증한다. 대신 북한은 과거 갖지 못했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미사일 개발과 핵을 갖게 되었다.

북한재건은 통일 후에나 가능한 경제적 통합으로 민주적 정치질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확립된 후에나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민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습독재체제 하에서 가용재원은 늘 비경제적 분야로 흘러들기 마련이다. 기껏해야 주민들의 배급량을 늘리는 수준일 것이 자명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다수의 신도시를 개발해왔다. 강북이 아니라 허허벌판에 강남이 개발되고 분당, 일산, 상봉, 세종 신도시 모두 농지나 미개발 지역에 세워졌다. 왜 그럴까?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열심히 북한 주도의 재건사업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보자. 강북 땅에 도로 수리, 부동산 개보수 등에 투입될 것이며 이 일도 온갖 분쟁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통일 후 북한재건은 허허벌판인 땅에 최신 기술을 활용해 추진해야 한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의 폐허 더미에서 경제강국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더 이상 비용 운운하며 통일의 시기를 늦추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I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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