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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통일을 위한 10개 항 프로그램 제5항

통일 전 동독 공산당의 마지막 목표는 당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모드로(Modrow) 총리는 서독 콜 총리에게 일종의 국가연합인 조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를 제안하며 시간을 벌어 위기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했다. 콜은 모드로의 조약공동체 제안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동독을 압박했다. 다름 아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권을 선출하라는 것으로 동독은 이 조건을 수용해 1990.3.18.일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를 치러 반공을 내세운 드메지어 정권을 선출했다. “Wir sind aber auch bereit, noch einen entscheidenden Schritt weiterzugehen, nämlich konfoederative Strukturen zwischen beiden..

[독일통일 왜곡, 여전하다]

정권이 바뀌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후에도 독일통일에 대한 왜곡이 여전하다. "서독은 브란트 동방정책 이후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진보정권은 물론 보수정권도 화해협력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평화통일을 달성했다"는 주장인데 사실과 맞지 않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진보학자는 물론 보수학자도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하고있어 우려스럽다.서독은 동독과 협력사업을 꾸준히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 인권,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원칙을 준수했다. 동독이 소련제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자 미국산 퍼싱II를 서독에 배치할 것을 처음 경고했던 사람은 사민당(SPD)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였으며 동독이 경고를 무시하자 실제로 퍼싱II 700여 기를 서독에 배치했던 사람은 기민련(CD..

슈타지 형사소추

통일 후 서독은 동독공산독재 정권에 대한 청산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처벌은 국내 일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매우 경미했다. 청산작업 1호인 슈타지(Stasi)의 경우 검찰이 고발한 251명 중 87명만이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다수가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으며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정규요원 1명과 비정규 요원 2명이었다. 정규요원 1명은 1983년 베를린 “Maison de France”에 폭발물을 설치해 테러혐의를 받던 인물이고 비정규요원 2명은 동독 탈출을 도운 조력자 Wolfgang Welsch에 대해 3차례 암살을 시도한 요원과 동독 탈출자 Siegfried Schulze에 대해 3차례 암살을 시도한 요원들이다. 3명 모두 슈타지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